무대 한쪽에 신들의 세계를 상징하는 그랜드 피아노가 거꾸로 매달렸다. 무대 위 대형 스크린 영상 속에서 주인공 브륀힐데가 홀로 앉아 있는 객석이 불길에 타들어 갔다. 서막에서 운명의 세 여신이 읽던 책들도 불타올랐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 등 바그너가 탐독한 철학서들과 그가 쓴 대표작 <음악과 혁명>이었다.
지난달 23일 대구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오른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중 4부 ‘신들의 황혼’(사진)의 피날레 장면. 브륀힐데가 연인 지크프리트의 시신을 태우는 불 속으로 뛰어들고, 거대한 불길은 하늘까지 치솟아 신들의 거주지인 발할라 성을 태워버리는 원작 내용을 독특하고 상징적인 무대 연출로 펼쳐냈다. 공연 직후 만난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 연출가 요나 김은 “스크린 속 불타는 극장은 만하임 극장”이라며 “신들의 죽음뿐 아니라 철학과 극장의 종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구오페라축제 최고 화제작
올해 19회를 맞은 대구국제오페라축제(9월 23일~11월 19일)의 최고 화제작인 만하임 극장의 ‘반지’ 4부작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지난달 16일 1부 ‘라인의 황금’과 17일 2부 ‘발퀴레’, 19일 3부 ‘지크프리트’에 이어 이날까지 인터미션을 제외한 공연 시간만 총 16시간 걸린 대장정이었다.
바그너와 인연이 깊은 245년 전통의 만하임 극장은 지난 7월 독일 현지에서 초연한 신작을 통째로 가져왔다. 극장 소속 가수와 합창단, 오케스트라 등 출연진과 제작진 220여 명이 대구를 찾았다. ‘반지’ 시리즈 국내 상연은 2005년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프로덕션 이후 17년 만이었다. 동시대 감성 담은 창의적 연출바그너 본향인 독일에서 온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바그너 사운드’는 과연 달랐다. 만하임 극장 총 예술감독 알렉산더 소디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공연장 음향 환경에 맞춘 악기 배치와 유연하고 자유로운 강약 및 완급 조절로 풍부하고 입체적인 소리를 만들어냈다. ‘바그너 가수’로 꾸려진 주역들도 정확한 음정 및 발음과 각자의 배역에 딱 맞는 음색과 성량으로 드라마에 착 달라붙는 가창을 들려줬다. ‘발퀴레’와 ‘지크프리트’에 이어 ‘신들의 황혼’에서도 브륀힐데 역을 맡은 소프라노 다라 홉스는 빡빡한 공연 일정에 다소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끝까지 혼신의 힘을 쏟는 열연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연출가의 독창적인 해석이 반영된 현대적인 미니멀리즘 무대도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3부에 이어 4부에서도 ‘반지’ 하면 연상되는 고대 게르만의 자연 세계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거대한 세트나 의상 대신 스크린 영상과 피아노나 의자와 같은 상징적인 소품, 현대적인 의상이 무대를 채웠다.
라인강의 세 요정은 오늘날의 걸그룹 차림으로 나오고, 등장인물과 떼놓을 수 없는 하겐의 창이나 지크프리트의 노퉁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와 현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듯한 창의적인 연출은 관객에게 무대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바그너가 고대 북유럽 신화를 원전으로 창조해낸 대서사 음악극을 ‘오늘날의 이야기’로 끊임없이 재해석해 새롭게 올리는 독일 오페라계의 최신 트렌드를 엿볼 수 있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