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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행이 31년 만의 최고치인 물가상승률에도 불구하고 세계 유일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 현재의 물가 상승은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경기를 되살리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은행은 28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단기 금리를 연 -0.1%, 장기 금리를 연 0±0.25%로 유지하기로 했다. 미국 중앙은행(Fed)과 유럽중앙은행(ECB) 등이 ‘자이언트스텝’(한번에 기준금리 0.75%포인트 인상)으로 강도 높은 긴축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고물가에도 마이너스 금리 고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장기 금리를 금리목표치 이내로 묶어두기 위해 10년 만기 국채를 연 0.25% 금리에 무제한 사들이는 ‘가격 지정 공개시장 운영’을 계속 시행한다는 방침도 명확히 했다. 금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겠다는 의미다.
구로다 총재는 “세계 경제가 완만하게 회복되고 있지만 선진국을 중심으로 회복 속도가 둔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며 “일본은 경기가 하강하고 물가는 상승하는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당분간(2~3년간) 코로나19의 영향을 주시하면서 기업 자금 조달 지원과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필요하면 주저 없이 추가 금융완화 조치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로다 총재 진단대로 일본의 물가는 기록적인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총무성이 지난 21일 발표한 9월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3.0% 올랐다. 소비세 인상으로 인한 일시적인 상승세를 제외하면 31년4개월 만에 가장 큰 폭이다. 물가상승률이 6개월 연속 일본은행의 관리 목표치인 2%를 웃돌았다. 도쿄 도심23구의 10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3.4%로 40년4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일본은행은 이날 회의 이후 발표한 ‘경제·물가 정세 전망’ 보고서를 통해 올해 물가상승률 예상치를 지난 7월 제시한 2.3%에서 2.9%로 상향 조정했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4%에서 2.0%로 낮췄다. 2023년 경제성장률 또한 2.0%에서 1.9%로 하향 조정했다. 구로다 총재는 “해가 바뀌면 수입 가격 상승에 따른 물가 인상 요인이 약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통화정책 변화 관측도일본은행은 최근 엔화 약세에 대해서는 “과도한 엔화 가치 하락은 경제 전반적으로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원론적인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9월 22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구로다 총재가 “2~3년간 대규모 금융완화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직후에는 달러당 엔화 가치가 146엔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가 24년 만에 엔화를 매수하는 방식으로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했다. 이달 21일에는 엔화 가치가 151.92엔으로 32년 만의 최저치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이날 엔·달러 환율은 146.5엔 수준에서 움직였다. 미국 Fed가 연말께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완화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달러 가치가 떨어진 영향으로 분석된다.
일본은행이 ‘나홀로 금융완화’의 지속을 강조하고 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조만간 일본의 통화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재무성에 따르면 해외 투자자들은 최근 5주 연속 일본 중장기 국채를 순매도했다.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려 국채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국채를 팔았다는 의미다. 해외 투자자들이 5주 연속 일본 국채를 순매도한 것은 8년 만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화 가치가 더 떨어지고 물가가 올라 서민의 고통이 커지면 정치권을 중심으로 일본은행에 금융완화 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압력이 커질 수 있다”고 예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