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점점 나빠진다면, 소설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작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연수(52·사진)는 2014년 이 같은 질문 앞에 멈춰 섰다.
중년의 위기감, 세월호 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폭로…. 변화와 충격이 한꺼번에 몰려온 해였다.
그간 3~4년마다 단편소설집을, 1~2년 간격으로 장편소설을 써내던 그는 긴 침묵에 들어갔다. “무기력과 비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고백한 시간이다.
그랬던 김 작가가 ‘희망’을 말하며 돌아왔다.
단편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출간한 김 작가는 지난 11일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에서 기자를 만나 “소설을 쓰려면 미래에 대한 전망이나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며 “코로나19로 기존 속도·효율 위주의 세상과 다른, 새로운 삶들이 보이자 무언가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소설집에는 최근 2~3년간 집중적으로 쓴 작품이 담겼다. 2013년 출간한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후 9년 만의 단편소설집이다.
소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시간’과 ‘이야기’다.
표제작에는 ‘재와 먼지’라는 소설 속 소설이 나온다. 동반자살하려던 남녀 주인공은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하루씩 과거로 돌아가는 삶을 살게 된다. 이들에게 내일은 과거일까 미래일까.
둘이 처음 만났던 날에 이르자 ‘과거 여행’은 끝난다. 다시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른다. 두 사람은 미래를 애써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변화한 건 현재에 대한 태도다. 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간직한 채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김 작가는 “상상할 수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며 “달까지 갈 수 없어도 달을 향해 걷듯이, 구체적 미래를 상상한다면 오늘의 삶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소설은 인간이 ‘이야기’를 통해 시간의 장벽을 넘을 수 있다는 데서 낙관의 실마리를 찾는다.
소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화자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인류의 긴 역사를 돌이켜보면, 결국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낙관이다.
혹시 이런 희망은 영원히 살아남을 소설을 남기는 소설가만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김 작가는 “한 사람의 정체성과 신념, 사회의 역사 등 세상 모든 것이 결국은 이야기”라며 “예컨대 상담사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고쳐주는 사람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김 작가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이토록 놀라운 미래’와 다르지 않다. 그는 “코로나19로 사람들이 평범함의 가치를 깨달았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고 했다. “기후 위기에 전쟁에… 평범함을 지키는 건 더 힘들어지죠. 2040년이 돼도 4캔에 1만원짜리 편의점 맥주를 사서 소중한 사람들과 나눠 마실 수 있으면 그게 가장 놀라운 미래 아닐까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