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王朝)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는 업적이 아니라 얼마나 버텼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 윈저 가문의 생명력은 경이적이다.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의 할아버지 조지 5세는 꿩 사냥과 우표 수집 말고는 특기가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왕조사(史)의 측면에서 그는 위대한 군주였다. 추풍낙엽처럼 유럽 왕가가 몰락할 때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베토벤과 바흐가 금지되고 독일산이라는 이유로 닥스훈트가 집에서 쫓겨났다. 영국 왕실에는 더더욱 최악인 게 전쟁을 일으킨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는 조지 5세의 사촌이었고 무엇보다 영국 왕실 자체가 독일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윈저라는 부드럽고 달콤한 이름으로 성씨 세탁을 하면서 위기를 넘긴다. 이름만 바꾼 게 아니다. 혈통을 지워버린 조지 5세는 매일 거리로 나가 국민들을 만났고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영국 왕실에 독일 혈통이 들어온 것은 18세기 초반이다. 명예혁명으로 집권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아들이 없었고 왕위는 메리의 여동생 앤이 물려받는다. 구교와 신교가 엎치락뒤치락 피를 주고받는 일이 지긋지긋했던 영국 의회는 왕의 혈통을 신교로만 잇는 법을 통과시킨다. 그러다 보니 앤의 후계자로 불려온 것이 독일의 하노버 공작이다. 영어가 서툴러 신하들과 프랑스어로 대화했던 이 사람이 조지 1세로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왕조의 이름이 바뀐다. 여왕의 남편 앨버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출신의 독일인이었고 이 이름이 윈저 왕가의 바뀌기 전 왕조명이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 6세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아버지는 무서웠고 형은 탁월했다. 그런 형이 사랑을 이유로 왕위를 던졌을 때 조지 6세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말더듬증을 극복했고 2차 대전 중에는 국민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왕실을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만들었다. 1945년 종전이 됐을 때 조지 6세는 버킹엄 궁전의 왕실 전용 발코니에 당시 총리이던 윈스턴 처칠과 함께 선다. 왕실의 명예를 나누는 엄청난 퍼포먼스였고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이벤트였다. 반향은 엄청났고 왕실의 인기는 상한가를 찍는다. 왕조 사수라는 임무를 완수한 조지 6세는 그간 쌓인 스트레스와 과다한 흡연으로 일찍 사망한다.
이 덕분에 25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2세가 조기 등판하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자신이 무려 70년이라는 세월을 왕위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재위 70년이라는 시간은 비현실적이다. 이를 체감하려면 다른 비유를 들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 때도 영국 여왕은 엘리자베스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도 영국 여왕은 엘리자베스였다. 대한민국 역사와 같은 시간을 여왕으로 보낸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업적은 무엇일까. 영국과 아일랜드의 영토 분쟁 해결을 꼽는 분이 있는데 여왕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다만 영국 군주 최초로 아일랜드를 방문했고 게일어로 연설하면서 상징적으로 분쟁 종결을 촉구했을 뿐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업적은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왕조의 시각에서 보면 여왕의 재위가 그 자체로 업적이다. 굳이 업적을 찾아내자면 하나 있기는 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은 독일계 그리스 왕자다. 원래 성은 바텐베르크였는데 1차 대전과 동시에 영국 왕실과 같은 이유로 창씨 개명을 한다. 방법이 독창적인데 독일어로 산(山)을 뜻하는 베르크를 영어 단어 마운트로 바꾸고 바텐은 영어식으로 읽어 배튼으로 한 뒤 순서를 바꿔 조합했다. 그렇게 바꾼 성씨 마운트배튼을 필립은 찰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왕실 보수 세력은 철벽 방어를 했고 아내인 엘리자베스까지 외면하는 가운데 필립은 좌절한다. 셋째인 앤드루 왕자가 태어났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까지 가세해 여론전을 펼쳤고(세상에 아비가 자식에게 성을 물려주지 못한다니 말이 됩니까) 변호사까지 동원해 왕실을 공격했다. 결국 필립은 또 패배했지만 아주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여왕의 후손들이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을 쓰게 된 것이다. 다만 이것은 가족의 성일 뿐 왕가의 이름은 여전히 윈저 가문이다. 성씨와 가문이 일치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로 그렇게 엘리자베스 2세는 왕조의 이름을 사수했다.
따듯하고 친절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사는 다소 과해 보인다. 수사에 걸맞은 여왕들은 따로 있다. 그중 하나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다. 엘리자베스보다 두 살 어린 나이에 여왕에 올랐고 그녀의 즉위에 적대적인 주변 국가들로부터 침공당하는 과정에서 조국과 가문을 지켰으며 남편과 아들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세웠다. 업적이라고 부르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