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등 경제·금융당국 수장들이 어제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고 자금시장 경색을 풀기 위한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 공급 계획을 내놨다. 8조원인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액 16조원으로 증액, 프로젝트파이낸싱(PF) 관련 증권사 3조원 지원, 전 지방자치단체의 지급보증 성실 이행 등이 골자다.
자금시장이 패닉으로 치닫는 가운데 경제수장들이 모여 꽤나 파격적인 대책을 내놓은 것은 일단 평가할 만하다. CP·PF 시장이 발작 중이고, 신용 최상위인 공사채·회사채마저 소화가 힘든 상황에서 오늘부터 회사채·CP를 매입하기로 한 것은 가뭄에 단비 같은 조치가 될 것이다. “기존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하겠다”며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시장 안정 의지를 강조한 것도 적절했다.
모처럼 나온 과감한 대책을 환영하지만 자금시장 경색이 이미 두 달 전부터 감지됐다는 점에서 한발 늦었다는 지적은 불가피하다. 초우량채인 산업금융채권의 금리가 연초 연 1%에서 9월에 연 4%를 돌파한 상황이다. 디폴트 위험이 없는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 대한 자금시장 대접이 이 정도이니 여타 금융회사나 일반기업의 어려움은 필설로 하기 힘들 것이다.
상황이 이리 악화할 때까지 정부는 ‘면밀한 모니터링’ ‘필요한 시장대응 강화’와 같은 원칙론과 느슨한 메시지만 반복해 왔다.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 개최도 지난달 22일 이후 한 달 만이다. 국책·시중은행, 한전 같은 신용 최상위 기업들이 위험 대비 차원에서 고금리로 자금을 싹쓸이하며 시장 혼란을 가중하는 행태를 방치했다. 그러는 새 회사채-국채 스프레드(금리차)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로 벌어지며 패닉심리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말았다.
금융시장은 신뢰를 먹고 산다. 아무리 좋은 대책도 ‘뒷북’평가를 받으면 신뢰 회복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의 이상 징후도 점점 커지고 있다. 더 실기하다가는 감당 못할 후폭풍을 맞을 개연성이 높다. 물론 당국이 앞장서서 공포를 조장하고 호들갑 떠는 것은 금물이다. 영국의 실패에서 보듯 물가가 최우선 목표로 부상한 상황에서 과잉 돈 풀기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제적이고 과감하며 충분한 지원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