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로펌에서 근무하던 9년 차 변호사 A씨(36)는 지난 7월 사직서를 낸 뒤 대형 제조업체 법무부서로 이직했다. 반복되는 야근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가득하던 차에 해당 제조업체에서 “각종 법률 리스크 검토 등을 맡아달라”며 영입을 제안하자 곧바로 응했다. 로펌에서 일할 때보다 연봉은 2000만원가량 줄었지만 A씨는 “소득은 줄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다는 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뜨거워진 영입 열기
A변호사의 이직은 이례적 사례가 아니다. 최근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기업으로 떠나는 로펌 변호사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23일 한국사내변호사회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이 단체의 회원 변호사는 총 2407명으로 작년 말(2235명)보다 7.7% 증가했다.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5년(1547명) 이후 매년 늘고 있다. 한국사내변호사회는 국내 사내변호사(약 4500명·업계 추산)의 절반 이상을 회원으로 두고 있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변호사 영입에 나서는 것은 이전보다 중요하게 다룰 법률 리스크가 많아져서다. 통상임금, 주 52시간 근로제 등 새 노동정책이 잇달아 도입되면서 과거엔 사내 노사 협의 등으로 해결하던 노사 갈등이 법적 분쟁으로 치닫는 일이 늘고 있다. 여기에 올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기업들의 긴장감이 고조된 것도 변호사 스카우트에 불을 붙였다는 평가다.
인수합병(M&A)이나 해외 진출 등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사내변호사의 역할이 커졌다. 신규 사업에서 적법성 여부를 따지는 일이 필수 절차로 여겨져서다. 특히 새 먹거리 물색이 활발한 정보기술(IT)이나 플랫폼 업계에선 변호사를 공격적으로 영입하고 있다.
쿠팡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강한승 변호사를 경영관리 총괄대표로 영입한 데 이어 올해 1월엔 정종철 변호사를 물류 계열사인 쿠팡풀필먼트 법무부문 대표로 선임했다. 두 변호사 모두 김앤장 출신이다. 이들 외에도 최근 1년간 김앤장 변호사 10여 명이 줄줄이 쿠팡에 합류했다.
네이버도 변호사 영입에 적극적인 곳으로 꼽힌다. 이 회사는 지난 3월 율촌에서 M&A 자문 등을 맡던 윤소연 변호사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플러스 리더로 맞았다. 윤 변호사와 같은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율촌 출신인 최수연 대표가 직접 나서 스카우트를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엔 광장 출신인 김서현 변호사도 영입했다. ‘워라밸 갈증’ 변호사들, 적극 기업행기업들의 공격적인 영입 활동은 ‘워라밸’에 목마른 로펌 변호사들의 이직 욕구를 더욱 자극하고 있다는 평가다. 로펌은 대형사의 경우 신입도 억대 연봉을 받지만 만만찮은 업무량으로 야근이 일상화된 곳이기도 하다. ‘을’의 위치에서 고객들의 요구에도 응해야 한다.
대형 로펌들이 체계적인 진용을 갖추면서 이전보다 승진하기 어려워진 것도 이직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사 적체로 승진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판·검사와 주요 정부 부처 출신 변호사들이 대표변호사나 파트너변호사로 로펌에 합류하는 일은 더 잦아졌다. 한 대형 로펌 파트너변호사는 “업무 능력은 기본이고 고객 유치 능력까지 겸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이런 이유로 해외 유학과 파트너 승진을 앞둔 7~8년 차 변호사들이 이직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김진성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