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투자 얼어붙었지만…6개 키워드엔 '깜짝 훈풍' 불었다

입력 2022-10-20 17:41
수정 2022-10-21 01:42
금리 인상과 인플레이션 공포 등이 맞물리면서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이 급격히 얼어붙었다. 스타트업 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지난 1분기 6조8257억원이던 신규 벤처투자금은 2분기 4조6075억원, 3분기엔 3조1069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투자 호황기 시절 누리던 ‘파티’가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식품 커뮤니티 앱으로 유명한 ‘엄선’이 서비스를 접는 등 문을 닫는 사례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뭉칫돈을 끌어모은 스타트업이 있다. 서비스를 내놓기도 전에 100억원대 자금이 몰린 곳도 있다. 20일 한국경제신문의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인 한경 긱스(Geeks)가 더브이씨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 3분기 신규 벤처투자 372건 가운데 19%(72건)가 1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투자 빙하기를 헤치고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 스타트업은 시리즈A(첫 번째 기관투자) 단계에서 수백억원대 자금을 유치한 리벨리온부터 시리즈G(일곱 번째 기관투자) 단계 투자를 유치한 비바리퍼블리카(토스)까지 다양하다.

혹한기에 돈이 몰린 스타트업의 특징은 여섯 가지로 나뉜다. 돌봄 같은 ‘생활 밀착형’ 스타트업, 기업용(B2B)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업체, 미래의 발이 돼줄 자율주행 기술 기업, 투자사들이 새로운 먹거리로 낙점한 블록체인·대체불가능토큰(NFT) 분야 스타트업,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스타트업,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 등이다. ‘생활 밀착형’, B2B 인기
일상을 편리하게 하는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내세운 스타트업이 투자 시장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돌봄 매칭 플랫폼인 케어링과 째깍악어는 각각 300억원, 160억원 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케어링은 요양보호사와 노인을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악어쌤이 오신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째깍악어는 만 1세부터 초등학생까지 유·아동 대상으로 돌봄 선생님을 매칭해주는 서비스다. 인테리어업계 ‘가격 정찰제’를 도입한 아파트멘터리는 450억원 규모 시리즈C 단계 투자를 유치했다.

확실한 매출처가 있는 B2B SaaS 기업도 투자자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경영관리 솔루션 ‘캐시노트’로 170만 명의 자영업자를 사로잡은 한국신용데이터는 LG유플러스 등 전략적 투자자로부터 350억원 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 반열에 올랐다. 기업 및 학교 구성원의 소통과 교육을 돕는 SaaS 업체 클라썸도 이달 들어 두나무앤파트너스 등으로부터 151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혹한기에도 달리는 ‘자율주행’자율주행 관련 스타트업도 최근 투자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스트라드비젼은 시리즈C 라운드에서 1076억원을 조달했다.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및 자율주행용 인공지능(AI) 기반 카메라 인식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회사다. 서울로보틱스는 KB인베스트먼트, 퓨처플레이 등으로부터 308억원 규모 시리즈B 투자를 유치했다. 2017년 문을 연 이 회사는 자율주행의 눈으로 불리는 3차원 라이다(LiDAR)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193억원 규모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한 에스오에스랩과 110억원 규모 시리즈A 투자 라운드를 마무리한 오토엘 역시 라이다 센서 장비를 생산하고 있다.

미래 먹거리로 낙점받은 블록체인 기술 분야에선 블록체인 기반 게임 개발사 플라네타리움랩스가 415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투자자 면면이 화려하다.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 애니모카브랜즈가 주도한 투자 라운드에서 카카오의 블록체인 계열사 크러스트유니버스, 삼성전자의 투자 계열사 삼성넥스트, 게임사 위메이드 등이 참여했다. 블록체인 인프라 스타트업 에이포엑스는 시드(초기) 단계임에도 129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SK를 비롯해 DSC인베스트먼트, KB인베스트먼트 등 유명 투자사가 주목했다. 대세 이어가는 ESG·바이오ESG 트렌드를 선도하는 스타트업 역시 돋보였다. 대체 가죽과 대체육을 개발하는 마이셀은 130억원 규모의 프리 시리즈A 투자를 유치했다. GS그룹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인 GS벤처스의 첫 투자처로 주목받았다. 현대차 사내벤처에서 출발한 이 회사는 버섯과 곰팡이 등을 활용해 가죽을 대체할 차세대 친환경 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푸드테크 스타트업 누비랩은 시리즈A 단계에서 100억원을 투자받았다. 이 회사 주력 제품은 AI 스캐너다. 식사 전후에 식판을 스캔해 음식의 섭취율, 잔반 비율을 분석하고 적정 식사량을 계획하도록 도와준다. 이 밖에 폐타이어를 활용해 친환경 카본블랙 소재를 제조하는 엘디카본, 버려지는 왕겨를 이용해 나노셀룰로스 같은 신소재를 개발하는 에이엔폴리 등도 ESG 트렌드에 부합해 대규모 자금을 조달했다.

유망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에도 꾸준히 자금이 흘러 들어갔다. 유방암·자궁경부암 신약 개발사 인핸스드바이오는 미래에셋벤처투자 HB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25억원 규모 시리즈C 투자를 유치했다. 건강기능식품 구독 서비스를 선보인 모노랩스는 전략적 투자자로 나선 청호나이스로부터 125억원을 유치했다. 인간 장기를 닮은 칩을 개발하는 멥스젠, 마이크로니들(미세 바늘) 패치 기술을 보유한 페로카 등도 VC의 낙점을 받았다. 열기 꺾인 플랫폼, 커머스e커머스(전자상거래), 플랫폼 기업 중 상위권 업체도 투자자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패션 커머스 플랫폼 브랜디는 지난 8월 29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명품 커머스 플랫폼 트렌비 역시 같은 달 350억원의 자금을 조달했다. 공동구매 플랫폼 ‘올웨이즈’ 운영사 레브잇 등도 100억원 넘는 자금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투자 시장 위축 영향을 피하진 못했다. 이전 투자 라운드 때보다 기업 가치를 낮추거나 자금 유치 규모를 줄이는 사례가 속속 나타났다. 8000억원의 기업 가치로 시리즈C 투자 유치에 나섰던 명품 플랫폼 발란은 몸값을 절반가량 낮췄다. 부동산 플랫폼 직방 역시 투자 유치 과정에서 3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던 몸값을 5000억원 이상 낮췄다.

남기문 스마일게이트인베스트먼트 대표는 “금리 인상기에 경기 침체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성장률’이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됐다”며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 성장성이 높은 시장을 노리거나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B2B 스타트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우/허란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