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애피타이저가 있었다. 손님을 집에 초대하면 상에 가장 먼저 올리는 일종의 ‘웰컴 푸드’. 작은 접시에 올라오는 짙은 밤색의 이 먹거리는 바로 씨간장이다. 조금만 찍어 먹으면 입맛을 싹 돋우는 역할을 하고, 그 집안의 음식 맛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식재료였다. 그 집의 역사가 담긴 장을 손님에게 나눠준다는 건 특별한 애정과 정성을 표현한다는 의미도 있다. “좋은 씨간장은 옹기째 훔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조들에게 씨간장은 말 그대로 모든 맛의 뿌리가 되는 식재료였다. 장맛이 조금 떨어졌다 싶으면 손맛 좋기로 소문난 집의 씨간장을 조금 얻어다가 집간장과 섞어 쓰기도 했다. 마을 전체의 음식 맛을 좌우했던 씨간장은 다른 간장과 뭐가 다를까. 간장 맛의 ‘씨앗’ 씨간장
우리 음식의 기본은 장이다. 간장 한 방울만 잘 써도 음식의 풍미가 확 달라진다. 간장은 발효 기간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용도도 달라진다. 얼마나 발효했는지에 따라 맛과 색도 완전히 달라진다. 막 담근 새 간장은 햇간장, 1~2년 정도 숙성시킨 간장은 청간장, 3~4년 된 간장은 중간장, 5년 이상 묵힌 간장은 진간장이라 부른다. 시간이 지나면 색이 짙어지고 풍미가 깊어지기 때문에 미역국 등 맑은 국물 요리에는 햇간장을 쓴다.
중간장은 잘 달여서 맑게 거른 다음, 나물이나 찌개 같은 일상 반찬을 만드는 데 쓰인다. 5년 이상 숙성시켜 진한 진간장은 갈비찜이나 불고기, 각종 조림 등 거무스름한 색이 잘 살아 입맛을 돋우는 요리에 사용된다.
씨간장은 간장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에서 가장 맛이 좋은 간장을 골라 오랫동안 유지해온 간장을 말한다. 색은 진한 흑색을 띠며 부드럽고 강한 풍미와 단맛, 감칠맛을 낸다. 맛이 뛰어난 씨간장은 잘 보관했다가 새로 담근 햇간장을 섞는 ‘덧장(또는 겹장)’의 형식을 거치면 씨간장에서 느낀 맛과 가장 가까운 풍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씨간장의 발효 기법은 마치 와인, 위스키의 블렌딩 과정과 닮았다. 씨간장과 섞이면 햇간장의 맛도 한층 더 깊어진다. 조상들은 수분이 날아가 양이 줄어든 만큼 햇간장을 부어 늘 같은 양을 유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런 과정은 콩으로 장을 만드는 두장(豆醬) 문화권의 중국, 일본과도 완전히 차별화된, 독창적인 한국만의 문화다. 10년 vs 100년, 오래 묵히면 맛있을까씨간장은 간장의 종자나 마찬가지다. 씨간장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좋은 씨간장이다’라는 것이다. 몇 대째 이어온 100년 된 씨간장, 200년 된 씨간장 등의 이야기를 보물처럼 간직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씨간장은 오래된 것보다 얼마나 잘 숙성해 훌륭한 풍미를 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맛있는 진간장을 골라 옹기에 5년, 10년 잘 숙성시켰다면 100년 묵은 씨간장보다 훨씬 더 좋은 가치를 지닌다.
씨간장을 꼭 선택받은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상식이다. 식품 회사들은 씨간장을 완벽한 온도와 습도로 숙성 처리해 간장의 베이스로 쓴다. 차로도 마시는 간장을 아시나요맛을 좌우하는 씨간장은 사실 버릴 게 없다. 간장독 아래 가라앉은 소금 결정체를 건져내 여러 번 씻고 말려 사용하면, 일반 소금보다 맛있는 천연 조미료가 된다. 나트륨은 적고 감칠맛과 단맛, 짠맛이 조화로운 게 특징이다. 씨간장은 또 양질의 단백질과 풍부한 지방을 함유하고 있다.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에 필수 아미노산과 지방을 보충해주기 때문에 스님들은 소화가 잘 안 되거나 속이 안 좋을 때 속을 다스리기 위해 천연 소화제 용도로 간장차를 마신다.
맛있게 숙성된 간장은 단순한 짠맛 이상의 맛을 갖고 있다. 감칠맛이 더해져 깊고 부드러운 단맛을 느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콩 발효에서 나오는 천연의 복합적인 맛이 섞여 한식이 아닌 다른 어디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이 같은 이유로 농림축산식품부와 한식진흥원은 문화재청과 함께 올해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했다. 2024년 연말에 등재 여부가 발표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