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더불어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쌀 가격이 5% 이상 넘게 떨어지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초과 생산된 쌀을 사들이는 게 골자다. 법안 내용은 농가의 환호를 받았다. 올해 논 농사는 초과 생산량이 25만t에 이를 정도로 풍년이 예상됐고 쌀값 하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정부와 여당도 움직였다. 지난달 25일 당정협의를 거쳐 쌀 45만t 규모를 시장격리하기로 했다. 수확기 내 시장격리 중에선 역대 최대 규모다. 쌀 시장격리란 쌀 수확기 생산량이 예상 수요량을 초과할 경우 쌀 가격 급락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초과 공급량을 매입하는 제도로 비축미 정책의 일부다.
이에 질세라 민주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심의할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안건조정위원회를 단독 개의하는 등 법안 통과에 다시 속도를 올리고 있다.
‘농심’을 잡기 위해 정치권이 경쟁적으로 쌀값 방어 총력전에 나서는 모양새다. 대다수 농민의 생계가 걸린 쌀값이 떨어지니 정부가 나서서 쌀을 매입해 가격을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쌀 소비는 구조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정부의 선심성 쌀 매입이 농민들에게 당장의 혜택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실제 수요보다 쌀을 과도하게 생산하게 하고 또다시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 등 악순환을 낳고 있다. 악순환 고리를 끊으려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쌀 시장 정부 개입의 오래된 역사정부의 쌀 시장 개입은 반복된 역사다. 1969년 도입된 추곡수매제도가 뿌리다. 정부가 직접 사들임으로써 농가의 쌀 생산을 독려한다는 게 취지다. 쌀 시장 수급 상황과는 관계없이 정부가 사들이고 소비자에겐 그 가격보다 값싸게 판매하는 게 특징. 매년 규모는 달라졌지만 보통 시중의 약 25% 규모를 정부가 사들였다.
쌀 시장개방과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의해 추곡수매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폐지 수순을 밟았다. 이때부터 쌀도 수급 상황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는 본래 의미의 ‘시장’ 영향권 아래에 들어갔다. 이에 정부는 과도한 시장 가격 변동을 통제하기 위해 2005년부터 시장격리 제도를 도입했다. 쌀값 방어를 위해 시장에서 해당 연도 10~12월 산지 평균 가격으로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가 쌀 가격에 개입한다는 점에선 개념적으로 엇비슷해 보여도 정부가 시장을 통해 쌀을 사들인다는 점에서 직접 농가에서 쌀을 사들이는 추곡수매제와는 다르다. 간단하게 두 제도를 비교한다면 추곡수매제는 직접 가격을 설정해 가격 개입 강도가 크지만 시장격리제는 수급에 영향을 주기에 가격 개입 강도가 상대적으로 작다. 현재까지 정부는 2005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21년 등 총 9회, 298만2000t 분량의 쌀을 시장격리 형태로 사들였다. 과잉 공급을 일상으로 만든 정부 개입시장 기능이 작동하는 상황에서의 정부 개입은 곧장 ‘구조적 문제’로 이어졌다. 쌀 수급 상황에 큰 영향을 주고 있어서다.
쌀 수요는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쌀 1인당 소비량은 2012년 69.8㎏에서 56.9㎏으로 10년 새 18.4% 줄어들었다. 식문화가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주요 수요처인 학교, 군부대 등 단체 급식을 하고 있는 곳만 해도 쌀보다는 시리얼, 햄버거, 피자 등 밀가루 음식이 점점 쌀을 대체하고 있다.
반면 쌀 공급 감소는 더디다. 쌀 재배 면적은 2012년 84.9만ha에서 지난해 73.2만ha로 13.7% 줄어들었다. 18.4% 줄어든 1인당 쌀 소비에 비하면 매우 작은 감소 폭이다. 시장격리제도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며 나타난 결과다. 정부는 과거 추곡수매제와 최근 시장격리제도로 쌀값을 매년 방어해왔다. 과잉 공급에도 매년 쌀값은 떨어지지 않는다. 농가로서도 매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쌀 농사가 다른 작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지타산에 맞을 뿐만 아니라 가격 안정성 측면에서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 밀 가격 대비 쌀 가격은 150~200%에 달한다. 최근 30년간 밀이 쌀보다 비쌌던 적은 2002년 가을과 2007년 단 두 차례뿐이었다. 그나마 농가 인구가 2012년 291.2만 명에서 지난해 221.5만 명으로 줄어들며 전체 쌀 생산량은 소폭 감소했다. 정부, 쌀값 방어에 ‘5조원’
쌀값 개입에 들어간 돈도 막대하다. 정희용 국민의힘 의원이 제출받은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시장격리제에 사용한 금액은 총 4조6780억원에 달했다. 총 9회 298만2000t 분량 쌀을 시장격리하는 데 쓰인 비용과 시장격리한 쌀을 보관하는 데 쓰인 비용을 합친 금액이다. 각각 4조4938억원과 1842억원이 소요됐다. 56만6000t 규모의 시장격리에 9299억원을 쓴 2009년이 가장 큰 규모의 시장격리를 한 해였다. 올해 시장격리에 투입될 쌀 45만t 매입 비용을 합산하면 이 비용은 총 6조원으로 늘어난다.
더 큰 문제는 시장격리로 사들인 쌀이 대부분 폐기된다는 점이다. 본지 취재를 종합한 결과 시장격리로 비축한 쌀은 제대로 되팔지도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시장격리한 쌀을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되판다. 본지 계산대로라면 대부분의 쌀은 약 7%만 되팔고 93% 규모는 매몰된다.
7%는 2017년 이후 5년간 시장격리 쌀 규모와 정부 비축미 판매 통계를 토대로 추정한 수치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쌀 시장격리 비용 4조4938억원 중 7%인 3145억원을 제외하고 4조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회수하지 못한 셈이다. 양곡관리법 통과되면 소요 재정 연 1조원 넘어재정은 재정대로 사용하고 과잉 공급은 과잉 공급대로 해소되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상황에서 민주당이 내놓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자충수’가 될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이 내놓은 개정안은 쌀 시장격리를 최대한 ‘즉각적으로’ 하자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현재 시장개입은 10~12월 산지 가격 평균으로 쌀을 매입하는 등 본격적인 수확기 이후 진행된다. 쌀 가격이 이미 어느 정도는 하락하고 난 뒤 가격 방어에 나서는 것이기에 농가가 시장개입 효과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단기적으로 농가 소득 안정성은 높일 수 있는 구조다. 문제는 정부의 재정 증가폭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는 점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쌀 시장격리 의무화의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민주당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시장격리 소요 비용은 2030년 1조4000억원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보고서는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비교했다.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고 정부 개입도 없는 상황과 개정안이 통과돼 정부 개입이 상시화된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 벼 재배면적은 2022~2030년 기간 중 연평균 1.3%씩 감소할 것으로 추산됐다. 시장 가격 하락에 따른 시장 조정이다. 1인당 소비량은 매년 1.8% 감소하지만, 과잉 공급 현상은 지속돼 초과생산량은 연평균 약 20만1000t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정부의 시장 개입이 없어 벼 재배면적이 감소해 결국 과잉 생산량은 적정선으로 수렴할 것이란 얘기다. 시장 효율의 작동이다.
반면 개정안 통과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벼 재배면적 감소폭은 둔화해 연평균 초과 생산량 규모가 같은 기간 연평균 46만8000t 규모로 확대된다는 게 농촌경제연구원의 분석이다. 개입이 없는 상황과 비교해 132.6% 많은 수준이다. 시장 개입은 지속되고 소비는 계속 감소하고 있기 때문에 그 비용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연구원은 2030년에 이르러서는 격리 규모도 64만1000t까지 늘어나 처리 비용이 1조40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봤다. 쌀 중심 벗어나 다른 작물로 다원화해야농식품의 ‘안보적’ 특성상 완전 자율시장을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식량 안보 문제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어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밀, 기름 등 국제 식량 가격이 폭등했다. 세계 식재료 물가는 줄줄이 상승했고 국내 민생 경제 참여자들도 ‘식용유 대란’, ‘밀가루 대란’ 등 여러 고초를 겪었다. 더욱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를 감안할 때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은 갈수록 잦아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상황에서 농작물을 자율시장에만 맡긴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쌀 과잉 공급에 따른 가격 하락이 논경작지가 급격히 줄어드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가꿔야 하는 경작지는 그 규모가 줄어든다면 농산물의 공급 탄력성이 매우 낮아진다. 경작지가 있어야 언제든 공급을 탄력적으로 늘릴 수 있다. 쌀 생산을 줄여도 경작지는 보호해야 하는 이유다.
식량 안보와 농가 수익, 국가 재정의 안정을 동시에 잡는 해법으로 전문가들이 자주 거론하는 게 작물 다양성이다. 논에서 주식용 쌀 외에도 밀, 콩, 사료용 쌀 등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는 주장이다. 쌀 중심 소비에서 다양한 곡물 소비로 변화하는 수요 환경에 대응하는 성격이자 논 경작지를 보호하는 방안이다.
이 정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곳이 일본이다. 일본은 적극적인 다른 작물 지원책을 통해 2009~2021년 사이 논 면적은 유지하면서 주식용 쌀 재배면적을 2009년 159만ha에서 2021년 130만ha로 대폭 줄였다. 대신 가공용 쌀, 사료용 쌀, 전분용 쌀, 콩, 밀 등 전략작물 재배면적은 2009년 32만ha에서 2021년 51만2000ha로 크게 늘렸다.
국내에서도 이런 흐름은 이미 시작됐다. 정부는 내년부터 콩·가루쌀(분말로 만들기 쉬운 쌀 품종)을 이모작할 경우 ha당 250만원의 직불금을 지급하는 ‘전략작물 직불제’를 시행한다. 벼 대신 콩이나 가루쌀을 단작하면 ha당 100만원, 밀이나 조사료 등을 벼와 함께 이어 지으면 ha당 50만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업계에서 이 같은 대책은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쌀값을 방어해 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는 상황에서 수로 설치, 토질 변경, 재배 기술 습득 등의 작물 전환 비용과 리스크를 선뜻 감당할 만한 수준의 지원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이미 기존에도 벼와 함께 밀을 재배하면 ha당 50만원 수준의 직불금은 존재했다. 경기도에서 10만㎡ 규모의 논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씨는 “작물 전환에만 3억~4억원의 비용이 든다”며 “이 정도 직불금이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앞으로는 ‘묻지마 쌀값 방어’는 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시장에 주는 동시에 다른 작물 재배에 대한 더 획기적인 지원책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임정빈 서울대 농업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시장격리는 단기적으로 농민을 위하는 정책 같지만 중장기적으로 쌀 과잉 공급을 유도하고 쌀값이 항상 하락하게 해 농민들이 결국 피해를 보게 만든다”며 “쌀만이 아니라 다른 작물들로 정책 지원을 늘려 쌀 과잉 공급의 구조적 문제를 푸는 데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구민기 사회부 기자 ko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