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주권의 시대…테크가 나라 명운 가른다

입력 2022-10-11 18:33
수정 2022-10-12 10:31
미국 뉴욕에서 북쪽으로 61㎞ 떨어진 인구 1500여 명의 작은 마을 요크타운하이츠는 세계 ‘암호 전쟁’의 최전선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컴퓨팅 능력을 구현하는 IBM의 127큐비트 양자컴퓨터 ‘이글’의 두뇌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 7일 IBM 왓슨리서치센터에서 만난 스콧 크라우더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양자컴퓨터는 100만 년이 걸릴 금융 분야 등의 암호 해독을 단 1초 만에 쉽게 풀어낼 수 있어 다가올 테크 전쟁의 핵심 무기”라며 “백악관은 특정 국가가 양자 기술을 이용해 글로벌 금융시장을 교란할 위험을 가장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6일 슈퍼컴퓨팅 기술의 중국 수출 제한을 발표한 직후 이곳을 방문한 것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다. 전문가들은 “테크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기술 주권’ 시대가 도래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경제미디어그룹은 서울대 공과대학과 함께 지난 8월부터 두 달여에 걸쳐 반도체, 2차전지, 바이오, 증강현실(AR)·가상현실(VR), 양자컴퓨터, 디스플레이, 자율주행, 신재생에너지, 콘텐츠 등 미래를 좌우할 9개 분야의 글로벌 ‘전략 기술’ 현장을 누볐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중국 등 6개국 21개 도시에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1등 기업들의 첨단 기술을 취재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첨단 테크는 인류의 미래를 구할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었다. 미·중 패권 다툼, 팬데믹, 러시아발(發) 에너지 전쟁 등은 테크의 정의를 바꿔놓고 있다. 국가 존망을 결정할 창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얘기다. 야코프 에들러 독일 프라운호퍼ISI 소장은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연합(EU)조차 미·중 간 패권 다툼에서 기술 주권을 지키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U가 아마존, 구글 등 미국 빅테크가 주도하는 클라우드 시스템에 맞서기 위해 ‘가이아X’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기술 주권 시대에 한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미국 중국 EU 등 대국의 패권주의적인 기술 주권은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지”라며 “전략 기술 생태계를 함께 구축할 파트너를 미국 외 다른 지역으로도 넓히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박동휘/뉴욕=김진원 기자
한경-서울대 공대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