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김만중·소동파·푸시킨…'유배의 밤'을 밝힌 천재 문인들

입력 2022-10-11 17:45
수정 2022-10-12 00:22

북송(北宋) 시인 소동파(1037~1101)는 죽기 직전까지 유배를 다녔다. 그가 마지막 유배지인 하이난섬(海南島)에서 돌아오는 길에 금산을 지나는데 한 화가가 그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로 줬다. 그림을 받아 들고 한참 생각하던 그는 붓을 들어 시 한 편을 써넣었다. ‘금산에서 그려준 초상화에 쓰다(自題金山畵像)’라는 제목의 시였다.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같고/ 몸은 마치 매어놓지 않은 배와 같네./ 평생의 공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황주(黃州)이고 혜주(惠州)이고 담주(州)라고 하겠네.’ 그가 평생 공적을 이룬 장소로 꼽은 ‘3주(州)’의 공통점은 죽을 고비를 넘길 정도로 고생한 유배지였다. 돼지비계 먹으며 '적벽부' 완성황주로 유배됐을 때 나이는 43세. 먹을 게 없어 풀뿌리로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아이들의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구제위원회를 만들고, 굶는 사람들을 위해 돼지비계로 만든 홍소육(동파육)을 개발했다. 그러면서 대표작 ‘적벽부’를 완성했다.

58세 때 쫓겨간 혜주와 60세 때 유배된 담주는 더 열악했다. 그런 곳에서도 그는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으려 안간힘을 썼고, 밤이면 캄캄한 절망과 싸우며 시를 썼다. 척박한 환경이 온갖 고통을 안겨줬지만,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돼준 곳 또한 이들 ‘3주(州)’였다.

수많은 시인이 유배지에서 빛나는 명문을 썼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이 숱한 유배형을 받았다. 정국이 회오리치던 15~16세기 관직에 있던 4명 중 1명꼴로 귀양을 갔다. 이들이 혹독한 조건의 적소(謫所)에서 고통을 딛고 쓴 작품이 유배문학이다.

가사(歌辭)의 대가인 송강 정철(1536~1593)과 시조(時調)의 대가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유배 중 당대 최고의 작품을 썼다. 대입 수학능력시험에 자주 나오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정철이 전남 담양에 유배됐을 때 쓴 것이다. 윤선도의 ‘견회요’도 먼 북방 유배지에서 썼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년간의 강진 유배 중 500여 권의 저서로 실학을 집대성했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은 한글 고전소설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유배지에서 창작했다. 장희빈에게 눈이 먼 숙종을 신랄하게 비판하다 연거푸 귀양길에 오른 그는 남해 노도에서 밤마다 천리 밖의 노모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린 시절, 돈이 없어 옥당에서 빌린 책을 필사하며 자신을 가르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 쓴 ‘사친시(思親詩)’가 절절하기 그지없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졌던가. 문집에서 남해 시는 반드시 빼야 하리.’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이 시를 문집에서 뺄 생각까지 했을까.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유배객이 갇힌 곳은 섬이었다. 남해를 비롯해 제주도 흑산도 거제도 등이 유배 1번지였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대정골에 유배됐을 때는 54세. 여섯 차례 국문 끝에 초주검이 돼 이곳까지 온 그는 언제 금부도사가 사약을 갖고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먹빛 같은 바다와 함께 9년을 지냈다. '세한도' '죄와 벌' '레미제라블'도그 외롭고 쓸쓸한 곳에서 나온 걸작이 문인화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다. 추사는 슬프거나 힘들 때, 억울할 때도 붓을 들었다. 글씨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썼다. 그렇게 쓴 글씨로 마침내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은 자유를 갈망하는 시를 썼다가 4년간 유배를 갔고, 그곳에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로 시작하는 명시를 썼다. 도스토옙스키도 시베리아 유배 체험에서 <죄와 벌> <카라마조프 형제들>이라는 걸작을 뽑아냈고, 솔제니친은 11년간의 강제 노동 속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를 완성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도 추방지인 영국령 건지섬에서 쓴 역작이다.

문인들에게 유배지의 황폐한 땅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창작의 영감을 고양한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유형의 몸을 가둔 폐쇄공간이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발현 장소였다니, 유배의 첫 글자 ‘흐를 류(流)’가 부드럽고 둥근 어감을 지닌 것만큼이나 역설적이다.

이들의 깊은 성찰과 지적 담금질이 유형의 악조건 속에서 벼려진 결과가 불후의 명작이다. 소동파의 ‘3주(州)’가 그렇고, 김만중의 <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그렇고, 푸시킨의 인생 시편이 모두 그렇다. 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유배지에서 극한의 정신으로 피워 올린 불꽃의 문장들!

◆ 김만중이 남해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사친시(思親詩)’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립다는 말 쓰자 하니
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 이미 흥건하네.
몇 번이나 붓을 적셨다가 도로 던졌던가
문집에서 남해 시는 반드시 빼야 하리.

◆ 소동파가 3주(州)를 회상한 ‘자제금산화상(自題金山畵像)’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같고
몸은 마치 매어놓지 않은 배와 같네.
평생의 공적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황주이고 혜주이고 담주라고 하겠네.

◆ 푸시킨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괴로운 법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