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속철도(KTX)와 수서고속철도(SRT) 등 국내 고속철도차량 제작에 스페인, 일본 기업이 뛰어들면서 관련 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새로운 경쟁자는 스페인 탈고(TALGO)와 일본 도시바다. 고속철도 출범 당시 기술을 이전받은 프랑스 알스톰을 2005년 수주전에서 물리친 지 17년 만에 해외와 경쟁하는 셈이다. 업계에선 “애써 국산화한 국내 철도 생태계가 저가 부품과 외국 기술에 위협받게 됐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해외사 진입하는 韓 고속철 시장
10일 철도업계에 따르면 코레일은 KTX 노선에 투입될 동력 분산식 고속차량 EMU-320 136량의 입찰공고를 이르면 이달 말께 낼 계획이다. 총 7600억원 규모 사업이다.
국내 철도업계는 크게 긴장하고 있다. 외국 경쟁자가 국내 기업과 팀을 이뤘기 때문이다. 국내 중견 철도차량 업체인 우진산전이 스페인 탈고, 일본 도시바와 지난 6월 기술협력 계약 후 컨소시엄을 이뤄 이번 입찰에 참여한다.
이 업체는 국회에 제출한 ‘고속철도차량 제작 참여 계획’ 보고서에서 “차체·대차의 설계는 스페인 탈고에서 주관하고, 차량 추진시스템 설계는 기술협력을 해온 일본 도시바로부터 검증을 받아 고속철도 제작에 도전하겠다”고 밝혔다. 고속철도 제작 경험이 없지만, 외국 기술을 빌려와 제작에 나서겠다는 얘기다.
탈고와 도시바가 우진산전의 기술협력 제안에 응한 것은 앞으로 국내 시장에서 줄줄이 발주가 예정돼 있어서다. 동력 집중식 차량 위주였던 KTX와 SRT는 향후 고가의 동력 분산식 차량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현대로템과 국내 철도 부품 업체들은 2007년부터 동력 분산식 연구개발에 매진해 지난해 1월 첫 결과물인 KTX-이음을 내놨다. 1995년 동력 집중식 개발 시작부터 따지면 국산화에 26년이 걸린 셈이다.
동력 분산식 열차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탈고는 ‘납품 실적’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세계 철도시장이 동력 분산식으로 대체되고 있어서다. 납품 경험 등 별도의 자격 제한이 전혀 없는 한국 고속철도 시장은 ‘스펙’을 쌓기 위한 최적의 시장으로 꼽힌다.
기술력에서 앞서고 있지만 국내 업계가 긴장하는 것은 가격 경쟁력 때문이다. 국내 고속철도는 ‘최저가 입찰제’를 시행하고 있다. 1차 평가에서 기술력을 평가하지만 이를 통과한 이후에는 동등한 입장에서 가격만으로 평가받는다는 게 철도업계 설명이다.
해외 컨소시엄이 값이 비교적 싼 외국산 부품을 사용하면 국내 업계가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탈고 컨소시엄은 보고서에서 “주요 장치는 납품 실적을 가진 국내외 제품을 우선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업계 “외국은 보호, 한국만 개방”
국내 철도 부품업계는 “국내 부품과 호환성이 없는 탈고가 차량을 제작하면 외국산 부품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외와 국내 업체의 접점이 없는 상황에서 명시된 ‘국내외 제품’은 사실상 외산 부품을 의미한다는 얘기다.
철도부품산업비상대책위원회는 “기술 이전 상대인 프랑스 알스톰으로부터 설움을 받으면서도 세계 네 번째 고속철도 상용화를 이뤄냈다”며 “애써 개발한 국산 기술이 퇴색되지 않도록 조처해달라”고 촉구했다.
세계 각국이 핵심 기술로 보호하고 있는 고속철도 산업에 한국만 지나치게 개방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유럽은 TSI(상호호환 기술 설계)라는 규제를 통해 사실상 비유럽국가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