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고강도 통화 긴축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국제 금융시장도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 금리가 상승하고 달러가 강세로 반전될 때마다 여러 국가가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역사적 경험이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최근 영국의 갑작스러운 감세정책 발표가 촉발한 시장 쇼크와 파운드화 폭락은 금융 선진국조차 위기감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은 아직 큰 무리 없이 국제 금융시장의 파고를 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달러 환율이 가파르게 올랐지만 대부분 미 달러화의 나 홀로 강세를 반영한 것으로 시장의 가격 기능이 작동한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다고 상황이 녹록한 것은 아니다. 가계 부채 문제와 성장 잠재력 저하로 통화정책의 선택지가 과거에 비해 제한적이고 경제의 복원력이 취약해진 것 등이 잠재적 불안 요인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 정치권의 위기의식 부재까지 겹쳐 한시라도 긴장의 끈을 놓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당연히 거시경제 운영의 최대 현안은 물가와 외환시장 안정이지만, 글로벌 인플레이션 이후의 세계 거시경제 환경 변화에 대한 고민과 대비도 필요하다. 구체적인 예측은 필자의 능력 밖이나 환경 변화의 방향성과 관련해 두 가지 추론 정도는 해볼 수 있다.
우선 버블 붕괴로 인한 경제위기를 새로운 버블로 대응하는 것이 어려워질 가능성이다. 바꿔 말하면, 그간의 저금리와 유동성에 힘입은 차입을 통한 성장(debt-driven growth)에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마침표를 찍을 가능성이다.
미국의 주택금융 버블 붕괴로 시작된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주요 선진국은 과감한 금리 인하, 양적완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대응했다. 2020년 코로나 위기 때도 특히 미국은 천문학적 규모의 통화·재정 확대를 시행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자산 규모(약 9조달러)는 코로나 위기 대응 과정에서 두 배로 급증했고, 2020년 미국의 재정적자(GDP 대비 9%)는 2008년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1930년대 대공황의 교훈에 충실한 이런 정책 대응으로 제2의 대공황은 피했으나, 초저금리 기조와 유동성 과잉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부채 증가를 수반한’ 새로운 금융 버블이 탄생했다. 결과론적이지만 기존의 버블이 새로운 버블로 대체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돌려막기식 위기 대응은 이미 위험 수준에 근접한 부채 문제 때문에 점차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글로벌 금융 버블의 발생과 확산을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것이 세계 경제 안정의 관건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현재의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금융 버블 확산 방지에 필요한 통화 긴축을 앞당겨 미래의 경제위기를 예방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둘째는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수준과 발생 빈도가 기조적으로 잦아질 가능성이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계기로 선진국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고 중국이 막대한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국제 분업 체제가 형성됐다. 이 분업 체제가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의 물가 안정과 지속 성장을 가능하게 했고, 중국이 세계 제조업 생산의 25~30%를 담당하는 거대 공장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점증하고 있는 미·중 갈등이 국제 분업 체제에 균열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더해 세계은행(WB)의 최근 전망은 중국의 인구 구조가 악화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2016년 정점을 지나 감소세로 들어선 중국의 생산가능인구는 향후 30년간 1억7000만 명 감소할 전망이다. 현재 60%를 넘은 도시화율을 감안하면 앞으로 농촌 인력이 산업부문으로 유입되는 규모 역시 축소될 것이다.
중국 인구 구조의 악화는 글로벌 수요 변화에 대한 글로벌 공급의 탄력적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수요 증가가 성장보다 물가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성장과 물가의 관계를 나타내는 필립스 곡선의 기울기가 커지면서 기존의 성장·고용 목표를 달성하려면 과거에 비해 기조적으로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분히 직관적인 추론이지만, 현실화할 경우 우리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