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 자네의 주검 앞에 나는 설 수가 없었네. 고교 1년생이던 자네를 제자로 받아 긴 세월 동고동락했네. 동료이며 동시에 자식 같은 자네의 죽음이 너무도 허망해서 마주하며 보낼 수 없었네. 뭐가 그리도 급해 먼저 가시는가. (중략) 거기서 기다리시게. 다시 만나 대포 한 잔 나누세.”
지난 8일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91)은 SNS에 이렇게 썼다. 4일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난 김태호 전 홍익대 미대 교수(사진)에 대한 추모의 글이었다. 1세대 단색화가 박 화백과 하종현 화백(78)을 사사한 고인은 생전 단색화의 계보를 잇는 ‘포스트 단색화’ 대표주자로 불렸다.
그가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칼로 긁어내는 과정을 스무 번 넘게 반복해 만든 ‘내재율’ 연작은 ‘벌집 회화’로 불리며 큰 사랑을 받았다. 연작 중 하나는 지난해 서울옥션 경매에서 2억1000만원에 낙찰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후학 양성에도 힘써 1987년부터 2016년까지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작품을 그리고 전시를 열던 고인은 지난달 고향인 부산을 방문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서울 체부동 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개인전 ‘질서의 흔적’은 유작전이 됐다.
갤러리 측은 전시를 오는 27일까지 연장 개최하기로 했다. 전시에서는 올해 신작인 ‘내재율 2022-57’을 비롯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쌓아올린 작품 세계의 정수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지난해부터 만든 대체불가능토큰(NFT) 디지털 작품도 나와 있다. 고인이 끝까지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물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