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단풍이 아닌 비를 먼저 데려왔다. 비가 가을을 데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태풍과 집중호우 속에서 포항에 있는 부모님 댁도 수해를 입었다.
“엄마 어떡해?”
“뭐가 어떡하긴 어떡해?”
상가에 물이 찼다가 빠졌고 청소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밭은?”
“조졌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상심하거나 비탄에 빠지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 억울해하기보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욕심은 덜어낸 목소리다. 기후변화의 시대를 만들어낸 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고 그 인간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주 폐막한 ‘2022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한 생태작가 최성각은 페름기 말에 일어난 대멸종을 언급하면서 “다음 멸종은 ‘호모 사피엔스’의 특성인 제어 불능의 욕망과 무책임으로 인한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나무가 하늘로 더 솟구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리그닌(Lignin)이라는 분자를 개발했듯, 인간의 욕망은 발전이나 ‘끝없는 성장’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며 “그런 와중에도 문학은 인간이 중요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간이 중요하기는커녕 재앙의 근원이라는 그의 말이 매섭다.
가을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숨기기 시작하고 또 하나는 드러내기 시작한다. 길을 걷다 목이 꺾여 있는 해바라기를 바라봤다. 가장자리로 꽃잎이 바짝 졸아붙어 있고 원 안에 나선형 모양의 씨앗들이 검고 날카롭게 모여 있다. 하나같이 엇나가지 않고 치밀하게 서 있다. 씨앗의 질서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가을밤도 그런 모양으로 박혀 있을 것만 같다. 저 휘어져 박힌 힘이 모여 지구가 우주에서 떨어져 나가지 못하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다르게 생각하는 일도 결국은 인간의 몫이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도, 성찰하는 것도 모두 인간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아직은 인간에게 희망을 걸어도 되지 않을까.
책방 행사를 하고 서울 안국동에서 광화문으로 걸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후 운동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2020년 8월 20일에 이 일이 시작됐으니, 이제 2년 동안 이뤄진 셈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TV를 켜니 사람들이 <동물원: 우아하고도 쓸쓸한 도시의 정원>을 읽고 있다. KBS ‘100인의 리딩 쇼-지구를 읽다’라는 프로그램이다. 길에서도 방송에서도 플랫폼에서도 문학뿐 아니라 전 분야에서 지구환경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절박해질 대로 절박해진 생태 환경의 현실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연을 그대로 두지 않고, 아름다운 것만 있으면 그것을 꺾거나 뿌리째 뽑아 인간의 정원에 들인다. 아름다운 것이 곁에 있다고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닌데.
송재학의 시는 북극곰의 수컷이 새끼 곰을 잡아먹는 이야기다. 더 이상 사냥할 수 없어 제 종족을 잡아먹어야 하는 북극곰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자 용서를 구하는 북극황새풀 이야기다. “흰색이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에는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는 구절을 곱씹어 읽으면 온난화가 불러오는 비극이 바로 곁에 와 있다는 감각에 시달린다.
기후 문제를 풀어가는 이들의 사유가 환경 문제에 대한 각성은 가능하게 하지만 각성 이후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인간에 대한 기대 없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일 앞에서 포기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깊은 죄책감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다음을 이야기하려면 인간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간이 중요하다는 착각에 빠지는 길이 아니라 인간이 해야 할 실천들을 찾는 길이라면 좋겠다. 이병일의 시 ‘녹명’은 눈밭을 파헤치는 사슴을 묘사한다. 사슴은 눈밭을 걷다가 풀 한 포기를 발견하면 혼자 냉큼 먹지 않고 운다고 한다. 같이 먹자고, 배고픈 다른 사슴을 부르기 위해 풀피리처럼 운다고 한다. 모두가 함께 사는 공생을 꿈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생의 지혜는 인간 세계에도 존재해 왔다. 희망이 있다는 얘기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악하게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일회용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쓰고 있지만 텀블러는 400년 동안 썩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다. 환경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정말 환경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도 실천하기를 멈출 수 없는 인간, 뭔가 잘못 짚었다는 예감에 수시로 빠지는 인간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