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0월 05일 17:2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회사채 시장 '돈줄'이 마르면서 기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자금 조달 환경이 척박해지면서 신용등급 AA급 대기업 계열사까지 공모채 대신 장기CP와 사모채 시장으로 우회하는 등 조달 구조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A급 이하 기업들은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우량 기업도 공모채 대신 사모채?장기CP로 우회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사업계열사인 SK루브리컨츠는 장기 CP를 발행하겠다고 지난달 30일 증권신고서를 제출했다. 한국신용평가는 SK루브리컨츠의 신용등급을 'AA(안정적)'로 매겼다.
만기구조는 2년물 700억원, 3년물 1300억원, 4년물 500억원, 5년물 500억원 등 총 3000억원이다. 2년물은 연 5.303%, 3년물은 연 5.337%, 4년물은 연 5.427%, 5년물은 연 5.448%로 발행 할인율을 책정했다. 확보한 자금은 미전환잔사유(UCO) 등 원자료 대금 납부 등에 사용할 방침이다.
사모채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대기업 계열사도 등장했다. CJ그룹 계열사인 CJ E&M(AA-급)은 지난달 29일 사모채 시장에서 3년물 1600억원과 5년물 500억원을 각각 발행했다.
발행 시장에서 소외받았던 A급 기업에 이어 우량 신용도를 갖춘 AA급 기업까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간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 계열사들은 주로 공모채 시장에서 자금을 확보했다. 하지만 조달 환경이 악화되면서 수요예측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둬 평판이 깎이는 것보다 다소 높은 금리가 책정되더라도 장기CP와 사모채의 문을 두드리는 대기업 계열사들이 늘어나고 있는 모양새다.
발행물에 대한 기관투자가의 투자심리가 주춤하면서 수요예측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둔 기업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달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한 메리츠금융지주(AA급)은 미매각 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총 3000억원 모집에 1500억원만 수요예측에 참여했다. 메리츠금융지주가 부진한 성적표를 받은 건 부동산 PF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부동산 PF 시장이 침체기로 돌아서면서 자회사인 메리츠증권의 실적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츠증권은 부동산PF 대출 비중이 높은 대표적인 증권사 중 한 곳으로 꼽힌다.
상업용 부동산 시장 위축에 직격탄을 맞은 리츠도 기관투자가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SK리츠(AA-급)는 지난달 27일 960억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50억원의 주문을 받는 데 그쳤다. 금리 인상으로 조달 환경이 악화된 데다 상업용 부동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까지 겹치면서 기관투자가들의 눈길을 끄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설명이다.
조달 환경이 악화되면서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는 AA급 기업들도 공모채 발행을 주저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달 회사채 발행을 검토했던 교보증권(AA-급)은 일정을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요예측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도 조달 금리가 껑충 뛸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지난달 26일 수요예측에서 완판에 성공한 CJ제일제당은 회사채 3년물 발행 금리가 연 5% 초반대에서 형성될 전망이다. 지난 1월 발행한 3년물 회사채 금리는 2.719%로 책정됐다. 약 9개월 만에 이자 비용이 2%포인트 넘게 뛰어오른 것이다. A급 기업들도 P-CBO 시장 ‘기웃’신용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A급 이하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빨간불'에 들어왔다. 공모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P-CBO 시장을 기웃거리는 A급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분위기다. P-CBO는 자체 신용으로는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다. 대기업들은 평판 훼손을 우려해 P-CBO 발행을 꺼려왔지만, 최근 금리가 빠르게 오르면서 자금조달 전략을 수정했다는 평가다.
SK에코플랜트는 지난 29일 P-CBO를 통해 600억원을 확보했다. 3년 만기에 표면 금리는 6.404% 수준이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SK에코플랜트 신용등급은 'A-(안정적)' 수준이다. 신용등급 'A(안정적)'인 효성중공업도 같은 날 700억원 규모의 P-CBO를 발행했다.
발행 시장에서 소외된 기업들은 은행 대출 창구로 몰려들고 있다. 국민·신한·우리·하나·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지난달 29일 기업대출 잔액은 692조3669억원으로 한 달 전(681조6676억원)보다 10조원 넘게 늘었다.
기업들의 조달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회사채와 국고채 간 신용도 차이를 보여주는 스프레드(금리 차이)는 벌어지고 있다. 4일 기준 'AA-'급 무보증 회사채 3년물 금리와 국고채 3년물 금리의 신용 스프레드는 1.094%포인트까지 뛰었다. 201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스프레드 확대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환경이 위축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기업들의 자금난은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한국은행이 올해 남은 두 번의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빅 스텝(금리 0.5%포인트 인상)'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은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하는 베이비스텝을 밟을 경우 대기업 50%가량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를 낼 수 없는 취약 기업으로 분류될 것으로 봤다. 빅 스텝으로 갈 경우에는 대기업 60%가 금리 취약기업에 해당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잇따른 금리 인상으로 채권 시장이 불안해지면서 정부도 직접 개입에 나섰다. 먼저 정부와 한국은행이 국채시장 안정을 위해 총 5조원을 긴급 투입했다. 국채를 사들여 채권 금리 급등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취지다. 추가적인 정책 지원에 대한 기대감도 나온다. 일각에선 채안펀드(채권시장안정펀드)가 도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 대형 증권사 회사채 발행 담당자는 "대기업들도 회사채를 보유 현금으로 상환하거나 은행 대출 창구를 찾고 있다"며 "올 연말까지는 회사채 시장 냉각기가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