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킹달러'를 넘어 '갓달러'(God Dollar) 랍니다. 원·달러 환율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13년 만에 1400원대를 돌파했습니다. 환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던 1400원대를 뚫자 전문가들은 "환율 레벨(수준)을 전망하는 건 의미가 없어졌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하루 변동폭이 20원에 달하는 현재와 같은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1500원대 진입 가능성도 열어놔야 한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1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지난주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40원을 돌파했습니다. 금융위기가 닥쳤던 2009년 3월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상승 속도도 무서웠습니다. 지난달 22일 심리적 지지선이었던 1400원을 돌파한 지 일주일도 안돼 40원 넘게 급등한 겁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달에만 연고점을 11차례 경신하며 파죽지세로 치솟았습니다.
이는 미국 중앙은행(Fed)이 고강도 긴축 정책을 시행하면서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우려, 영국의 대규모 감세안에 따른 경제 불안, 중국의 성장 둔화 조짐에 따른 위안화 약세 등이 원·달러 환율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여행하시다가 남은 달러 있으면 판매 부탁드려요."
갓달러의 독주는 국민들의 경제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최근 당근마켓, 중고나라 등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개인 간 달러 거래 게시글이 심심찮게 올라오고 있습니다. 외국환 거래 규정에 따르면 국내 거주자 개인 간 외화 거래는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경우 5000달러까지 별도 신고 없이 가능합니다. 해외여행 수요가 늘면서 환전수수료를 줄이려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달러 직거래가 늘어나는 모습입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중고거래 플랫폼인 중고나라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미국 달러를 거래한다는 게시글은 작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큰 수수료 부담 없이 인터넷 고시 환율로 거래한다는 게 대부분입니다.
다만 사기 피해도 속출하고 있어 거래에 유의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최근 한 미국 유학 및 취업 준비 커뮤니티에는 한화 200만원 규모의 달러사기를 당했다며 조심하라는 게시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면서 미국에 자녀를 유학 보낸 가정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환율 급등으로 등록금이 늘어나고 생활비 부담도 커졌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학 2년차인 문 모씨는 "처음 유학왔을 땐 학교 적응이 힘들어 한동안 울며 다녔지만 이젠 계속 다니고 싶은 마음만 간절하다"며 "부모님께 생활비를 더 보내달라고 말하기 죄송스러워 잠을 줄이고 아르바이트를 2개 더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녀를 유학보낸 60대 정 모씨는 늦둥이인 아들의 유학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주말 대리운전을 고민 중입니다. 그는 "생활비가 부족해 라면도 못 사먹었다는 말을 듣고 가슴 아팠다"며 "내년 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한국에 돌어온다는 아들을 만류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버티기 위해 자녀들도, 부모들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모습입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내년까지 금리인상을 예고한 상황에서 달러화 독주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재료가 없다는 점이 상황을 더 답답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원화 가치는 다른 아시아 통화 대비 하락세도 가파릅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으로 원화는 59개국 통화 중 하락 속도가 여섯 번째로 빨랐습니다. 한국보다 통화가치가 더 많이 내린 나라는 일본, 터키, 헝가리, 프랑스, 핀란드 등 단 5개국에 불과합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올라설 가능성을 열어놓는 가운데 일각에선 1700원 진입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며 "국내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신용의 문제라면 어떻게든 환율 급등을 막을 조치가 필요하지만 미국 통화정책 여파로 인한 현상인 만큼 당국 개입도 큰 의미가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채선희 한경닷컴 기자 csun0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