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된 텍스트'…호텔로비 한복판 LED에는 詩가 흐른다 [이선아의 걷다가 예술]

입력 2022-09-28 18:02
수정 2023-04-26 11:40

호텔의 ‘얼굴’은 메인 로비다. 호텔의 첫인상과 품격을 보여주는 곳이어서다. 고급 호텔들이 저마다 고른 최고의 예술 작품을 로비에 내거는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높이 555m)인 롯데월드타워 76~101층에 자리 잡은 시그니엘 서울도 그런 호텔 중 하나다. 이 호텔의 메인 로비(79층)를 장식한 ‘얼굴 작품’은 미국 현대예술가 제니 홀저(72)의 ‘트루 리빙(True Living)’이다. 체크인 데스크 맞은편 벽면에 걸린 1.5m 길이의 LED(발광다이오드) 전광판이 그의 작품이다.

언뜻 보면 여느 평범한 전광판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체크인 순서를 기다리는 투숙객은 물론 구경삼아 들른 사람들도 이 전광판이 값비싼 예술품이란 걸 모른 채 지나친다. 이걸 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린 건 전광판이 아니라 전광판에 흐르는 메시지다. “자유는 사치일 뿐 필수품이 아니다(FREEDOM IS LUXURY NOT A NECESSITY)”, “휴머니즘은 한물 갔다(HUMANISM IS OBSOLETE)”,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IT IS MAN’S FATE TO OUTSMART HIMSELF)”….

마치 시(詩)처럼 13시간 간격으로 재생되는 메시지들을 곱씹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시그니엘 서울이 올 1월 이 작품을 로비에 설치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호텔 관계자는 “트루 리빙을 고른 건 시그니엘은 그저 ‘잠자는 공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벗어나 ‘사유(思惟)하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홀저는 텍스트를 활용하는 현대예술가 중 가장 잘나가는 작가로 꼽힌다.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가 하면, 전쟁 재난 성차별 등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건물 외벽, LED 전광판, 돌 조각, 티셔츠 등 그가 사용하는 ‘그림판’은 다양하지만, 핵심은 언제나 글이다.

홀저는 이런 작품으로 1990년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미국관 대표 작가가 됐다. 그해 ‘금메달’ 격인 황금사자상도 받았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에선 그의 2억8000억원짜리 작품이 개막과 동시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메시지는 짧지만 철학적이고, 웃기지만 신랄하다. 1977년 뉴욕 길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며 시작한 ‘격언’ 연작은 홀저의 이름을 알린 대표작이다. “구원은 팔 수도 살 수도 없다”, “유행을 따르는 건 위로가 되지만 위험도 따른다”, “어차피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즐겨라” 등 생각할 거리를 주는 메시지에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홀저의 메시지는 1982년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도 걸렸다. “권력을 남용하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란 내용이었다. 순수 예술이 ‘상업 마케팅의 메카’에서 꽃 피운 순간이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도 볼 수 있다. 3년 전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 홀저는 한국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문구 11개를 뽑아 과천관에 있는 돌다리 위에 새겼다. 단단한 돌에 새긴 글을 한국 사람들이 손으로 만지며 의미를 되새겨보라는 의도였다. 그중 하나. “당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걸 늘 기억하라(REMEMBER YOU ALWAYS HAVE FREEDOM OF CHOICE).”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