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세계적인 인재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계 50위권 대학 졸업생들에게 당장 일할 곳을 정하지 않아도 2~3년 짜리 취업비자를 발급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글로벌 인재 쟁탈전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정책으로 평가된다. 도쿄대와 베이징대 등 아시아 지역의 대학이 여럿 포함됐지만 한국의 대학은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6일 영국 정부 포털사이트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취업 제안이나 고용 계약이 없더라도 세계 명문대 졸업생에게 한해 취업 비자를 내주는 고도인재 비자(HPI) 제도를 지난 5월30일부터 운영하고 있다. 낮은 '세계 대학 순위'에 발목
3대 글로벌 대학평가 기관 가운데 2곳 이상에서 최근 5년간 50위권에 오른 대학이 대상이다. 오는 10월31일까지 유효기간을 인정받는 '2021년 지정 학교'에는 총 37개 대학이 선정됐다.
하버드대와 예일대 등 미국의 대학이 20곳으로 절반이 넘었다. 영 연방 국가인 캐나다와 호주는 각각 3곳과 1곳의 대학이 지정됐다. 유럽에서는 스위스가 2곳, 독일, 프랑스, 스웨덴이 각각 1곳의 대학이 이름을 올렸다.
아시아 지역 대학은 8곳이 포함됐다. 일본은 도쿄대와 교토대, 중국은 베이징대와 칭화대 등 두 곳씩 지정됐다. 홍콩(홍콩대, 홍콩중문대)과 싱가포르(싱가포르국립대, 난양공대) 등도 두 곳씩 이름을 올렸다.
반면 한국은 한 곳의 대학도 영국 정부의 비자 우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지역의 경쟁 대학에 비해 낮은 순위가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다.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즈고등교육(THE·Times Higher Education)'의 2022년 평가에서 한국에서 순위가 가장 높은 서울대는 54위에 그쳤다. KAIST(99위)와 성균관대(122위)도 100위권 안팎이었다.
미국 'US뉴스앤월드리포트'의 2022년 순위에서는 서울대가 130위, 성균관대와 고려대가 각각 230위와 272위였다. 국내 대학 한 곳도 100위권에 들지 못했다.
비자 우대 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딴 졸업생은 2년, 박사는 3년짜리 취업비자를 받는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취업비자와 달리 현지 기업의 취업 제안이나 고용계약이 없어도 취업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가족을 동반할 수 있고,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추면 장기 고용비자로 전환할 수도 있다. 국적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지정 대학을 졸업한 한국인도 신청이 가능하다. 선진국 정부가 '인재쟁탈전' 주도
영국 정부가 이처럼 파격적인 비자 우대정책을 도입한 것은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영국 정부는 2030년까지 '과학·기술 초강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현재 1.75%인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지출 규모를 2027년까지 2.4%로 늘릴 계획이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회) 이후 유럽 지역에서 인재를 불러 모으기 어려워지자 시선을 전세계로 돌렸다는 분석이다. 비자 우대혜택을 주는 대학의 절반 이상이 미국 대학인데서 보듯 '글로벌 인재 블랙홀'인 미국을 견제하는 정책으로도 해석된다.
세계의 인재들이 미국으로 몰리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영국 외에 캐나다 싱가포르 등 많은 나라들이 다양한 우대책을 내걸고 인재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중국은 해외 두뇌 영입 프로젝트인 ‘천인계획(千人計劃)’을 통해 미국과 일본, 유럽의 최우수 석학들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그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논문 수에서 처음 미국을 제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태국도 이달부터 10년짜리 장기 비자를 도입해 인재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전기차와 디지털화, 탈석탄화 등은 '제로(0)'에서부터 경쟁이 시작되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만 확보하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전문가들은 선진국 정부가 구체적인 대학 이름까지 거론해 젊은 인재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는데 주목했다. 인공지능(AI), 양자물리학 등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자 정부가 직접 선점 경쟁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민간 대학평가 기관의 순위를 우대 근거로 활용한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공정성 등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많았던 세계 대학순위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진단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