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의 리셀(되팔기) 플랫폼 ‘크림’에서는 백화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에르메스의 중고 ‘버킨백’ 20여 개가 판매되고 있다. 매장 판매가격은 1400만원(1만100달러) 수준이지만, 크림에서의 가격은 두 배가 넘는 3400만원대다.
버킨백 마니아들은 ‘과연 이 수준에도 팔릴까’하는 가격을 감수하고라도 리셀 시장을 찾고 있다. 매장에서 구입 예약을 걸어둬도 손에 쥘 때까지 몇 년이 걸리는 불편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치가 아픈 건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과 나이키 등 글로벌 ‘넘버1’ 패션기업들이다. 백화점, 면세점 오프라인이 유통을 주도하던 시대에는 제품 가격 결정권을 이들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리셀이 대세가 된 지금 이들의 시장 장악력에 여기저기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에르메스도 “재판매 안 돼”
26일 명품업계에 따르면 에르메스코리아는 지난 3월 거래 약관에 ‘재판매 관여 금지’ 조항을 포함했다. ‘(에르메스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이) 영리 목적으로 재판매하는 행위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보증한다’는 내용이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에르메스 상품을 구매하는 모든 소비자에게 이 약관을 제시하고 사인을 받고 있다. 사인하지 않는 구매 희망자는 상품을 구입할 수 없다.
에르메스는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최상단에 자리하는 브랜드다. 콧대 높기로 이름난 에르메스조차 약관에 이런 조항을 포함할 정도로 리셀 시장은 글로벌 패션업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베인&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중고 명품시장 규모는 2017년보다 65% 확대된 가운데 정품 매출은 같은 기간 1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중고 시장은 앞으로 5년간 연평균 15% 성장하며 같은 기간 신규 상품 매출 증가율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흔들리는 가격 결정권글로벌 명품·패션기업들은 상품의 가격 결정권이 리셀 플랫폼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명품 및 주요 패션 브랜드는 희소성에 기반해 가격 책정 등의 측면에서 주도권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상품 판매 수량을 제한해 왔다”며 “리셀 플랫폼의 등장으로 이 공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가에 프리미엄을 얹어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부 리셀러가 재판매 시장을 주도함에 따라 소비자가 피해를 볼 공산이 크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리셀러가 인기 제품을 입도선매하면, 선량한 소비자들이 정가에 명품을 구입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라며 “백화점, 면세점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 명품을 팔면서 리셀 플랫폼까지 운영하는 유통사들이 소비자에게 두 번에 걸쳐 수수료를 떼어먹는다는 얘기도 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에르메스뿐 아니라 샤넬, 나이키 등도 리셀 플랫폼과 전면전을 펼치는 실정이다. 나이키코리아는 지난 5월 “리셀 플랫폼 스톡엑스가 나이키 짝퉁 신발을 팔고 있다”며 공개 저격한 뒤 소송전을 펼치고 있다. 샤넬도 지난해 7월 ‘재판매 금지’를 천명하면서 제품을 구매하거나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때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다. 대세 뒤집을 수 있을까명품·패션 브랜드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셀 시장 활성화라는 큰 흐름이 뒤집힐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상당수 전문가가 회의적으로 본다. 중고 시장에서 개인이 거래하는 것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일부 명품 업체는 아예 리셀 플랫폼과 손을 잡아 이들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려는 역발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구찌, 보테가베네타, 생로랑 등을 소유한 프랑스 케링그룹이 2020년 중고 거래 플랫폼 더리얼리얼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지난해에 또 다른 플랫폼 베스테에르에 지분(지분율 5%) 투자한 게 그런 사례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