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일본에는 서양 인상주의 거장들의 작품이 참 많습니다. 세상에 딱 일곱 점밖에 없다는 고흐의 ‘해바라기’가 대표적입니다. 일본의 민간 미술관인 ‘SOMPO미술관’에 가서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해바라기와 함께 폴 세잔, 고갱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조선업 재벌인 마쓰카타 고지로가 모은 모네 르누아르 마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 일명 ‘마쓰가타 컬렉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국립서양미술관을 비롯해 공립 미술관의 컬렉션도 풍성합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국가대표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 인상주의 거장의 그림 한 점 제대로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일본 국민을 추월(2018년, 각국이 벌어들인 돈으로 실제 얼마를 소비하는지 나타내는 구매력평가(PPP) 기준)한 상황. 문화 인프라가 경제를 못 따라가니, 못내 아쉬운 상황이었죠.
지난해 4월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생전에 수집한 ‘세기의 기증품’이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에 추가되면서 이런 아쉬움도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모네와 르누아르, 파블로 피카소 등의 작품을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한국에서 볼 수 있게 된 거죠.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서양 거장들의 주요 작품을 모두 모은 전시거든요.
기업가 이건희, 재벌가 수장 이건희에 대해 여러 생각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수집가 이건희’가 남긴 컬렉션이 한국 미술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가 남긴 선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집가 이건희가 궁금해집니다. 그는 미술 작품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작품은 어떻게 고르고 샀을까요. 왜 이 많은 작품을 모았을까요. 오늘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남긴 에세이, 미술계 관계자들의 증언, 언론 보도 등을 종합해 수집가 이건희를 조명합니다. “경영처럼 그림도 입체적으로 봐야 한다”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①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모네·고갱·르누아르·카미유 피사로·피카소·살바도르 달리·후안 미로 등 서양 거장들의 주요 작품이 모두 나왔고 ②전시 구성이 화가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거지요. 전시를 관람하면 고갱은 피사로의 제자였고, 피카소의 입체주의 작품에도 영향을 줬는데, 피카소는 후배 작가인 달리와 미로를 도왔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당시 세계의 미술 수도였던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졌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입체적 사고’를 강조하는 이 회장의 수집 철학을 반영했다”(전시를 기획한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게 미술관의 설명입니다. 1997년 이 회장이 출간한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는데요, 들여다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간략히 정리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시죠.
“기업을 잘 경영하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한다. 그러려면 ‘입체적 사고’를 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를 심더라도 숲을 생각하고 숲의 여러 효과와 가치를 생각하는 것처럼, 사물의 본질을 생각하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소문난 ‘영화광’인 이 회장은 영화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입체적 사고를 훈련하는 방법으로 조금 특이한 영화 감상법을 권한다. 보통 관객들은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해 본다. 하지만 조연이나 등장인물 각자, 감독과 카메라맨의 입장까지 두루 생각하면서 감상해 보자. 생각 없이 영화를 보면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보면 한 편의 소설, 작은 세계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고 바쁘다. 하지만 습관으로 굳어지면 입체적인 ‘사고의 틀’이 만들어진다. 음악을 들을 때나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일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회장의 말처럼 작가들의 관계에 유의하며 전시를 보다 보면 당시 미술의 흐름, 파리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려볼 수 있는데요. 근현대 서양 예술의 조류를 알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훨씬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입니다. 작가들 사이에 얽힌 사연은 제가 쓴 기사 “한국에서 만나는 100년 전 파리의 ‘벨 에포크’”(9월 21일자, 온라인 기사는 20일)에 자세히 정리돼 있으니 기사를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작가의 대표작·유출된 고려 불화는 무조건 산다”
이 회장이 미술품을 수집하는 원칙은 “작가의 대표작은 가격을 따지지 않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술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시죠. “이 회장은 ‘탁월한 천재 한 명이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경영 철학을 그림에도 적용했습니다. ‘그림도 고만고만한 것 말고 머리(대표작)를 잡아야 한다’는 거였죠. 세계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주요 작가의 대표작을 한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대표적인 게 이건희 컬렉션에 있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입니다. 크기가 무려 가로 5.7m, 세로 2.8m에 달합니다. 한국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화가인 김환기의 그림 중에서도 최대 규모입니다. 만약 경매에 나온다면 한국 미술품 최고가(약 132억원)를 새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이 회장이 이 그림을 구입한 건 1980년대입니다만, 이때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가였을 겁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 그림의 존재를 알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사겠다”고 했습니다.
이 회장이 수집 초기부터 미술관(리움미술관) 설립을 염두에 뒀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이 회장은 개인 취향보다 미술사적 가치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컬렉션에는 인상파부터 현대미술까지 주요 작가의 작품이 거의 다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작가의 최고 대표작만 모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표작이 아니더라도 얘기가 되는 그림을 샀죠. 고갱의 흥미로운 초기작인 ‘센 강변의 크레인’이 대표적입니다. 돈이 있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안목과 열정이 있어야 이런 컬렉션을 만들 수 있어요.”
미술품 수집에 대한 이 회장의 열정은 엄청났습니다. 이 회장의 수집을 도왔던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지독하게 공부하고 깊이 들어갔다. 도자기 공부도 많이 해 스스로 감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남는 시간에 미술품을 모으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컬렉션에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들였다.”
해외 유출 문화재를 찾는 데도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우리 문화재는 한데 모아둬야 가치가 있다”는 게 이 회장의 지론이었습니다. 고려시대 예술의 정수지만 국내에 남은 게 거의 없었던 불화(佛畵)가 대표적입니다. 이 회장은 고려시대 불화를 집중적으로 수집했고 이 중 상당수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습니다. “가격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사라”고 지시한 덕분에 서양의 미술관과도 여러번 경합을 붙었지만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직접 움직인 건 이호재 회장이었지만 구체적인 구매를 지시한 건 이 회장이었습니다. 뉴욕, 런던, 파리에서 열리는 경매 도록들을 직접 꼼꼼히 보고 사야 할 작품엔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동그라미 두 개는 ‘무조건 사라’, 동그라미 하나는 ‘가능하면 사라’는 뜻이었다. 경합 상대가 한국인이면 무리해서 경쟁하지 말라고 했다. 일단 한국으로 들어오면 된다는 뜻이다. 재산을 불리기 위한 수집이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애초부터 목적이 달랐다.”
때로는 이 회장이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기도 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진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대표작 ‘지옥의 문’이 이렇게 한국으로 들어온 사례입니다. 당시 12개 에디션 중 단 한 점이 남아 있었는데, 워낙 국보급 미술작품이라 프랑스 정부가 한국에 보내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호재 회장이 “어렵다”고 보고하자 이 회장은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남기고 직접 프랑스로 가 담판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비싼 작품만 산 건 아닙니다. 이번 전시에 나온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은 일종의 ‘가성비’ 작품들입니다. 피카소는 같은 종류의 도자기를 일종의 판화(에디션) 개념으로 수십~수백개 만들었기 때문에, 일부 작품은 가격이 100만원을 조금 넘기는 등 그림보다 훨씬 저렴하거든요. 미술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그림보다 값이 싸면서도 특유의 활달한 상상력이 담겨 있어서 창조성을 자극하는 피카소의 도자기를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이 회장의 ‘도자기 사랑’도 영향을 미쳤겠죠. 민병찬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자기·전적류는 이 회장이, 회화·목가구·민속품은 주로 홍라희 여사가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서현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 서재에 앉아 도자기 들여다보던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이 회장이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도자기는 내가 제일 잘 봐. 다른 사람들은 감정만 해주면 되지만, 나는 내 돈 들여 사잖아’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21세기는 문화 경쟁 시대, 이게 내 의무”
이 회장은 왜 이렇게까지 미술품 수집에 시간과 돈, 열정을 쏟았을까요. 삼성과 삼성가는 이와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을 함께 만들었던 홍라희 여사는 삼성가(家) 미술품 컬렉션에 대한 기여를 묻는 한국경제신문의 질의에 “알리고 싶지 않다. 알아서 잘할 테니 언론에 얘기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LEE 컬렉션’으로 꽃 피운 이건희·홍라희의 심미안, 2021년 4월 22일)고 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행보에는 미술품 수집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일각의 시선도 영향을 끼쳤을 듯합니다.
대신 남아있는 이 회장의 어록을 통해 그 이유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그는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 축사에서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건데요, 특히 앞으로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문화를 ‘핵심 역량’으로 키워야 하고 이를 자신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97년 에세이집의 한 대목을 정리한 내용을 보시죠.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문화를 일상생활과 다른 ‘특별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21세기에 필요한 문화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문화적인 소양이 자라나야 한다. (중략) 연주나 그림의 수준이 좀 떨어지더라도 상관이 없다. 고급문화만이 훌륭한 문화는 아니다. 사람들의 문화적 감수성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듣고 보며 형성되기도 한다.” ‘생활예술’을 장려해서 국민들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뜻이죠. 왜 그게 필요한지는 이 다음에 나옵니다.
“(중략) 앞으로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에도 그 기업의 문화와 이미지가 담겨야 한다. 문화적인 경쟁력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문화적 자산이 만들어지면 그 효과는 신제품 몇 개 개발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다. (중략) 21세기는 문화 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1990년대가 되기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여 문화 인프라를 넓히는 데 힘썼다는 건 정말 탁월한 선견지명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듯합니다.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는 것처럼, BTS와 오징어게임 기생충 등 문화의 인기 덕분에 한국 기업들의 실적과 국가 이미지가 함께 올라간 것처럼요.
이런 선견지명 덕분에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한국 땅에서 100년 전 파리를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도 공짜로요(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입장료가 무료입니다). 현대미술 거장 이우환(86)이 지난해 3월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한 이 회장 추모글 ‘거인이 있었다’의 한 대목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미술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작품을 선별했다. (중략) 덕분에 한국의 고전미술 및 근현대미술, 그리고 글로벌한 현대미술의 수준 높고 내실 있는 컬렉션은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바가 되었다. 회장이 국내외 문화예술계에 이뤄낸 업적은 헤아릴 수 없다.”<svg version="1.1" xmlns="http://www.w3.org/2000/svg" xmlns:xlink="http://www.w3.org/1999/xlink" x="0" y="0" viewBox="0 0 27.4 20" class="svg-quote" xml:space="preserve" style="fill:#666; display:block; width:28px; height:20px; margin-bottom:10px"><path class="st0" d="M0,12.9C0,0.2,12.4,0,12.4,0C6.7,3.2,7.8,6.2,7.5,8.5c2.8,0.4,5,2.9,5,5.9c0,3.6-2.9,5.7-5.9,5.7 C3.2,20,0,17.4,0,12.9z M14.8,12.9C14.8,0.2,27.2,0,27.2,0c-5.7,3.2-4.6,6.2-4.8,8.5c2.8,0.4,5,2.9,5,5.9c0,3.6-2.9,5.7-5.9,5.7 C18,20,14.8,17.4,14.8,12.9z"></path></svg><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토요일마다 연재되는 기사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