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 역사가들은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문화예술이 꽃피운 시기를 이렇게 부른다. 그 시절 파리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명실상부한 ‘세계 예술 수도’였다. 그러니, 누가 부르지 않아도 클로드 모네,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등 거장들이 모여들었다. 천재들은 서로에게 영감을 줬고,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 등을 꽃피웠다.
100여 년 전 파리를 장식한 ‘벨 에포크’가 한국을 밝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21일 개막하는 전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통해서다.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이 기증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고갱,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의 세계적인 명작 원화 한 점씩과 피카소의 도예 작품 90점 등 총 97점이 관객을 맞이한다. 이건희 컬렉션 ‘서양미술 걸작’ 첫 공개
지난 4월 이건희 컬렉션의 목록이 발표됐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서양미술 걸작들이었다. 해외 박물관에서 한참 줄 서야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국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다. 하지만 이중섭 김환기 등 국내 거장들의 전시가 먼저 열리면서 기다림은 길어졌다.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만 지난 4월 공개됐을 뿐이다.
그 나머지들이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많은 공을 들였다”고 했다. 이 회장의 작품 감상 철학을 전시 구성에 녹여 당시 파리의 정취를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유신 학예연구사는 “작품에 얽힌 이야기, 예술가들 간 관계 등을 입체적으로 따져보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이 회장은 생각했다”며 “컬렉터의 생각을 반영해 8인의 거장이 파리에서 맺은 인간관계를 감안해 전시를 꾸몄다”고 했다.
전시는 7점의 유화 작품을 따라가며 이와 연관된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피사로의 ‘퐁투아즈 곡물시장’(1893)과 고갱의 ‘센강변의 크레인’(1975)이다. 파리와 근교 전원 풍경을 주로 그린 피사로는 젊은 작가 발굴에도 힘쓴 ‘인상주의 대부’였다. 증권거래소 직원이던 고갱도 그중 하나였다. 피사로는 센강변의 크레인 등 고갱의 초기작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읽어낸 뒤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인상주의 대표 작가인 모네와 르누아르는 피사로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전시장에는 모네의 수련과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1917~1918)가 걸려 있다. 수련은 추정가 수백억원으로 이건희 컬렉션에서 가장 비싼 작품이기도 하다. 피카소 도자기 90점 나와
후반부 전시는 피카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904년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 르누아르가 1919년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초상화를 그려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을 정도로 깊이 존경했다. 입체주의 화풍을 고안할 때는 고갱의 이국적인 화풍을 참고했다.
같은 스페인 출신 화가인 미로와 달리는 당시 ‘슈퍼스타’였던 선배 피카소를 존경했다. 미로가 1920년 파리를 방문한 것도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서다. 피카소는 가난한 미로의 작품을 사주는 등 여러모로 도왔다. 달리는 1926년 피카소를 만나기 위해 파리를 찾았다. 이때 피카소와 미로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소개받으며 초현실주의에 눈을 떴다. 전시장에서는 미로의 ‘회화’(1953)와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1940) 등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 출신인 샤갈도 피카소를 존경한 화가다. 전시장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결혼 꽃다발’(1977~1978)이 같은 주제(꽃과 정물)의 피카소 도자기 작품과 함께 놓여 있다.
전시장은 당시 파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꾸며졌다. 1900년대 초반 파리의 가로등 모양 조명이 은은하게 전시장을 비추고, 안쪽에는 그 당시 파리의 노천카페에 있을 법한 탁자와 의자들이 배치돼 있다. 명화를 비추기 위해 1억원 상당의 독일제 명품 조명을 구입했다. 전시는 내년 2월 26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