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일 도산서원장 "선비정신이 AI시대 정신적 빈곤 채울 것"

입력 2022-09-19 18:14
수정 2022-09-20 14:40
“요즘 불거지는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은 ‘나는 옳고, 남은 틀리다’에서 나오잖아요.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기본으로 하는 선비정신이 사회갈등 해결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사진)은 19일 서울 시민청에서 연 <뜻이 길을 열다>(나남)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담은 선비정신은 반목과 갈등이 날로 심해지는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덕목”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책은 김 원장이 선비정신의 현대적 가치를 되새기고 삶의 지혜를 찾는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과 에피소드,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뜻한다. 오늘날 인식은 그리 좋지 않다. ‘선비질’이란 말처럼 고리타분하고 앞뒤 꽉 막힌 사람을 선비라고 비꼰다. 조선 후기 정쟁을 일삼던 일부 양반을 선비로 잘못 인식한 탓도 있다. 김 원장은 이런 상황에도 10년 넘게 선비정신을 알리는 데 힘 써왔다.

본디 안동 사람은 아니다. 34년 동안 경제 관료로 일했다. 기획예산처 장관까지 지냈다. 퇴임 후 인연이 닿아 2008년부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5년부터는 도산서원 원장을 겸하고 있다.

김 원장은 “일본 식민 지배를 거치며 선비에 부정적인 인식이 덧씌워졌다”고 했다. “우리에게 선비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일본은 역설적이게도 수백 년 동안 퇴계 신드롬을 앓았습니다. 미국과 유럽에서도 현대문명이 부작용을 치유하기 위해 선비정신을 탐구하고 있죠. 선비정신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가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까마득한 후배인 고봉 기대승과 8년간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을 때 권위를 앞세워 누르지 않았다. 삶의 마지막엔 고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최근 우리 사회에 갈등이 커지는 것은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태도 때문”이라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도록 하는 선비정신은 이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상대에 대한 겸손과 공경의 마음을 갖춰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선비정신의 바탕에는 더불어 사는 지혜,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깔려 있다. 퇴계 역시 신분이나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했다. 서울 사는 아픈 증손자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사람들이 안동 퇴계 집에 있던 여종을 보내려 할 때 “생후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자기 아이를 버려두고 올라가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반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김 원장은 “인공지능(AI) 시대에는 AI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따뜻한 인품의 인재가 필요하다”며 “이런 인재는 어른들이 먼저 선비정신을 실천할 때 비로소 길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