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 피를 지우려…김창열은 물방울을 그렸다

입력 2022-09-19 18:07
수정 2022-09-20 00:19

흘러내리는 물방울, 타원형 물방울, 글자 위에 맺힌 물방울…. 물방울 하나만 50여 년간 그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방울 화가’ 고(故) 김창열 화백(1929~2021)의 작품 세계와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스토리다.

연출을 맡은 아들 김오안 감독은 다큐멘터리 속 내레이션을 통해 묻는다. “하나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하나의 구상이다. 수십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하나의 계획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돼야만 수십만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모든 불안을 물로 지운다”오는 28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김 화백의 이야기를 다룬 첫 다큐멘터리다. 김 화백은 지난해 92세로 별세했다. 작가는 떠났지만, 작품은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김 화백의 팬이라며 자신이 소장한 물방울 그림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추산으로 지난해 낙찰총액 4위(200억원)를 차지했다. 그의 앞에 있는 이름은 이우환(394억원), 구사마 야요이(365억원), 김환기(214억원)뿐이었다.

다큐멘터리는 김 화백의 둘째 아들이자 뮤지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고 있는 김 감독과 프랑스 아티스트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이 함께 연출했다. 김 감독은 내레이션도 맡았다.

작품은 김 화백의 과거 인터뷰 영상부터 마지막 모습까지 넉넉하게 담았다. 김 화백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어느 날 물감 위에 뿌려둔 물이 만들어낸 물방울의 신비로움에 매료됐다. 그리고 1971년 첫 번째 물방울 작품인 ‘밤에 일어난 일’을 시작으로 줄곧 물방울만을 그렸다.

이 물방울엔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죽음에 대한 커다란 상처가 서려 있다.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격동기를 겪었다. 가족과 생이별해야 했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도 지켜봐야 했다. 그런 김 화백에게 물방울은 마음의 안식이자 위로였다. 김 화백은 말한다. “물방울은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악과 불안을 물로 지운다.” 달마대사 같았던 구도자적 면모다큐멘터리에선 김 화백의 구도자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다. 김 화백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달마대사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잠들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자르고, 9년간 면벽수행(벽을 마주하고 수행하는 것)한 그 스님 말이다.

카메라는 그가 달마대사처럼 벽에 그림을 세워둔 채 가만히 바라보며 명상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포착한다. 이 명상은 그에게 창작의 동력이 됐다. 김 감독은 “아버지는 연금술사처럼 화실에 머무르며 작업에만 매달렸다”며 “아버지는 전쟁에서 본 모든 피가 순수한 물로 바뀔 때까지 평생 그리고 또 그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다른 예술 다큐멘터리에 비해 아티스트의 내면을 훨씬 더 깊게 파고든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지켜본 아들이 메가폰을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걸 다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연출을 맡았다”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던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이런 아들 앞에서 목숨 걸고 휴전선을 넘던 순간을 떠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쏟기도 했다.

그렇다고 김 감독이 아버지와 살가운 사이였던 것만은 아니다. 김 감독은 “자라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했다. 김 화백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다고 그는 전했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범접할 수 없는 위인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김 화백이 유명해지는 것을 싫어하거나 멀리하는 예술가가 아니었다는 것도 보여준다. 김 감독은 “아버지를 존중하되 최대한 절제하며 접근했다”며 “결코 그를 신성화하려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높은 편이다. 영상미도 뛰어나다. 짜임새 있게 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김 화백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를 때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김 화백이 왜 50년 넘게 물방울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눈물과 불안의 의미를.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