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쿠팡, 토트넘 초청의 놀라운 효과’(본지 7월 18일자 시론)를 통해 쿠팡플레이가 손흥민의 토트넘 초청 경기를 단독 중계함으로써,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점유율과 모바일 쇼핑앱 업계의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쓴 적이 있다. 이른바 ‘관심 추종 기업(attention seekers)’으로 불리는 아마존 등 플랫폼 기업이 즐겨 쓰는 마케팅 전략의 하나인데, 비슷한 시기 쿠팡의 또 다른 비밀병기는 드라마 ‘안나’였다. 리플리 증후군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 역시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손흥민 경기에 이어 ‘안나’ 역시 쿠팡의 영업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안나’ 종영 이후 예상치 못한 데서 사달이 났다. 이 드라마를 만든 이주영 감독이 자신과 협의 없이 8부작을 6부작으로 편집해 방영했다며 쿠팡에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감독은 저작권법에서 저작자 또는 실연자로서 저작인격권을 갖는데, 자신이 감독한 드라마의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가 이에 포함된다. 쿠팡은 제작사와 협의해 적법하게 편집했다고 맞섰으나 분위기는 쿠팡에 불리하게 형성됐다. 결국 쿠팡은 감독의 요구를 수용해 공식 사과하고 감독판을 8부작으로 송출하겠다고 발표했다. 감독판이 공개됐지만 이미 6부작을 본 사람들이 감독판을 다시 볼 가능성이 크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감독은 자신의 작품이 온전히 공개되지 못해 아쉬움이 무척 클 것이다. 쿠팡으로서는 소송으로 가지 않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로써 입은 타격이 작지 않다. 무엇보다 손흥민 경기에 이어 킬러 콘텐츠로 사람의 관심을 끌어모아 영업에 활용하는 관심 추종 기업으로서 이미지 추락이 만만치 않아 향후 콘텐츠 제작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창작자와 매체 간의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기서 매체는 기획사, 음반사, 방송·통신사 등 창작물이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수단 또는 통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소개된 실제 일화가 있다. 영국의 록밴드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는 음반 제작자에게 6분 분량의 곡을 만들겠다고 하자, 제작자는 3~4분을 넘는 노래는 방송에서 틀어주지 않을 것이라며 웃으며 조롱한다. 가정이지만 제작자의 반대를 수용했다면 서로 다른 듯 하나로 어우러진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불후의 명곡은 태어나지 못했거나 두세 개의 곡으로 쪼개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형식이 내용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 수단·통로가 형식과 내용을 결정하는 시대가 됐다. 과거 창작자들이 기획사, 음반사, 방송사, 출판사 등을 통해 소비자(팬, 독자)를 만났다면, 이제는 플랫폼이 그 매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매체와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소비자를 만날 수 없었던 때에 비하면, 이름 없는 창작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 열린 셈이다. 소비자 역시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게 됐으니 문화 융성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융성하기만 할까?
플랫폼이라는 수단과 통로는 전통 매체와 달리 전 세계적으로 몇몇 테크기업이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콘텐츠를 만들거나 사들이는 것은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된 영업을 위한 손님 끌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니 기업이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메세나와 비교할 수 없다. 플랫폼이 곡은 4분 이내, 드라마는 회당 40분 이내, 소설은 문장 길이가 어떠해야 하고 전체 분량은 몇 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등 이른바 스펙을 정한다면, 프레디 머큐리나 이주영 감독처럼 저항해 성공하는 예도 있겠지만, 대다수 창작자는 사전에 자기 검열을 통해 독자·소비자가 아닌 플랫폼의 구미에 맞게 창작 형태와 내용을 정할지도 모른다.
문화 영역에서 권력은 편집에서 나온다. 소재를 선택, 배열, 구성하는 편집 권력을 갖게 된 플랫폼은 선거로 뽑힌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를 지원하는 메세나도 아니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기반할 뿐이다. 권력이 세면 셀수록 그에 걸맞은 감시와 견제가 있어야 하는데, 저작권법이 그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 드라마 ‘안나’ 사태가 남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