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투자를 고려하던 대만 반도체 기업을 설득해 미국에 공장을 짓도록 했다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의 거침없는 행보는 국제 현실의 냉엄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미국에서 생산한 전기차에 대해서만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맞물려 노골화하는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재확인해주고 있다.
세계 3위 실리콘 웨이퍼 생산업체인 대만의 글로벌웨이퍼스는 지난 6월 미국 텍사스주에 50억달러를 들여 1500개 일자리를 창출하는 신규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이 회사는 당초 독일 공장 계획이 무산되자 유력 대체지로 한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공장 건설비가 미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그러던 차에 6월 러몬도 장관이 글로벌웨이퍼스 최고경영자와 접촉, 한국 공장 건설비에 맞춰 주겠다며 미국 투자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보조금 지급을 당근으로 내걸었으며, 실제로 이 회사는 미국의 새로운 반도체지원법에 따른 보조금 수혜 대상이 됐다.
러몬도 장관은 미국 월스트리트지에 이 얘기를 소개하면서 “미국이 특정 기술 분야를 지배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미국에서의 투자”라고 말했다. 미국이 첨단 기술 확보와 자국 내 공장 유치에 얼마나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다. 아울러 이런 일들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을 강하게 예고한 셈이다.
한국이 글로벌웨이퍼스와 먼저 접촉하고도 미국에 투자 유치를 빼앗긴 것은 관계 부처의 소극적 대응 탓이 크다. 문재인 정부가 해외 투자 유치에 시큰둥했던 데다 정권 교체기에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겹친 결과다. 그렇다고 새 정부 들어서 사정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도 않다.
미국 IRA법 통과에 넋 놓고 당한 것이 비근한 예다. 1년 동안 표류하던 법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급진행된 측면이 있지만, 우리 외교가 워싱턴 정가의 동향 파악에 부실하다는 것을 방증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 도요타와 캐나다, 멕시코 등이 미국 의회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로비력을 확충해 자신들 이익을 관철한 것과 대조적이다.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는 앞으로 IRA와 같은 무리한 법들을 더 만들어낼 공산이 크다. 문 정부 5년 동안 중국과 북한에 기형적으로 편중하느라 흐트러진 미국 정가에 대한 정보망을 강화하고, 로비 네트워크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졸면 죽는 게 비정한 신냉전의 경제 안보 전쟁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