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지우고 파냈다…관객을 덫에 사로잡기 위해"

입력 2022-09-07 18:28
수정 2022-09-08 00:33

미술작품은 그 자체로도 예술이지만, 만드는 과정 또한 예술이다. 잭슨 폴록이 ‘추상 표현주의의 대가’로 우뚝 서게 된 데는 캔버스에 물감을 흩뿌리거나 페인트 통을 들이붓는 ‘액션 페인팅’이 한몫했다. 미술 애호가들이 프랑스 작가 이브 클랭에게 열광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람 몸에 물감을 묻혀 붓처럼 사용한다’는 아이디어였다.

독특한 것으로 따지면 이기영 작가도 뒤지지 않는다. 그는 ‘그리는 과정’이 아니라 ‘지우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이 작가는 한지를 문자로 가득 채운 뒤 지워내는 과정을 반복한다. 종이 위에 시간을 겹겹이 쌓으면서 무의식적인 자아를 담아낸다. 특이한 제작 과정이 빚어낸 오묘한 아름다움에 국내는 물론 미국 싱가포르 일본 등 해외 미술계도 박수를 보냈다. 이 작가가 신작 20여 점을 들고 미술 애호가들을 찾았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개인전 ‘지우고 채우고, 파내어 설치한 덫’을 연 것.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주로 한지와 먹으로 작품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다. 한지 위에 석회가루를 얇게 뿌려서 말린다. 그 위에 먹으로 누군가의 이름, 문장, 날짜 등을 쓴 뒤 손이나 대나무 붓, 사포로 문질러 지운다. 이렇게 하면 먹이 번지면서 한지의 표면을 고루 채운다. 먹이 마르고 나면 이 과정을 열 번 넘게 반복한다. 한지 위로 여러 겹의 층이 쌓이면 날카로운 칼로 기하학 형태의 선을 정교하게 파낸다. 파낸 자리에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채워 넣고, 그라인더로 그림 전체를 갈아내 작품을 완성한다.

먹으로 쓰고 지우는 데만 열흘 넘게 걸리는 고된 작업이지만, 이 작가는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해야 하는 것보다 덜 쓰고, 덜 지우면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작품을 만드는 건 마치 공중에서 줄을 타는 것 같아요. 먹을 지우고 다시 채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우연성’과 선을 새기는 작업을 통해 작품에 부여하는 ‘질서’가 서로 긴장감을 이루죠. 이런 ‘무의식과 의식의 만남’이야말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주제입니다.”

그가 ‘형태를 지우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4년 전부터다. 그전에도 이 작가는 석회가루 위에 먹으로 그림을 그린 뒤 지우는 작업을 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형상에 그는 ‘먹꽃’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작가가 ‘먹꽃 작가’로 불린 이유다. 하지만 4년 전 그는 문득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공허함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먹꽃마저 지우고 흑(黑)으로 물든 한지 위에 선만 새겼다.

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덫’이라고 표현한다. 그림을 보다 보면 검은색 바탕 사이로 얇고 가는 선이 빛처럼 반짝이며 표면 위로 떠오른다. 선을 파낸 자리에 넣은 물감 때문이다. 이 선은 관람객들이 가늘고 정교한 선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유혹한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 추석 전날과 당일은 휴무.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