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민연금의 주주대표 소송 결정 권한을 기금운용본부에서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로 이관하기로 한 이전 정부 때 방침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국민연금 지배구조 개혁을 본격적으로 수술대에 올려야 한다.
1988년 시행 이후 국민연금은 기금 운용 규모가 948조원(작년 말 기준)에 달하는 세계 4대 연기금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국민 10명 중 3명만이 ‘신뢰한다’(2021년 국민연금 인식조사)고 답할 정도로 불신의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배경에 국민연금의 취약한 지배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지적이다.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세계 4대 연기금 가운데 최고 의사결정기구의 장을 정부 인사가 맡은 곳은 국민연금이 유일하다. 구조적으로 국민연금이 정권 입맛에 따라 운용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역대 정부가 국민연금 독립을 내세웠지만 구호에 그쳤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기관투자가가 투자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앞세워 국민연금을 기업 경영에 대한 개입 수단으로 이용하려 나섰다.
기금운용위원회에 참여한 위원들에게 전문성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20명으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는 관계부처 차관과 공단 이사장 등 당연직 정부 위원(5명), 노동조합 연합단체가 추천하는 근로자 대표 3명, 농어업인 단체 추천 2명, 자영자 단체 추천 2명, 소비자단체 및 시민단체 추천 2명 등이 참여하고 있다. 사회단체나 노조 추천 위원들은 기금 수익률보다 기금 운용을 통해 기업 간섭에 더 관심을 둔다는 지적이 한두 번 나온 게 아니다. 이 와중에 문재인 정부에선 국민연금 대표소송 추진과 관련, 소송 결정 주체를 노동·사회단체 추천 위원이 다수인 수탁자책임위원회로 옮기기로 해 논란을 증폭시켰다. 국민의 노후 자금을 바탕으로 경영 개입에 나서는 것에 대해 ‘연금 사회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런 지배구조로는 국민의 노후 자금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기금 운용의 독립성·중립성·전문성 확보가 급선무다. 독립성과 전문성은 수익률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국민연금을 정권의 정책 도구로 활용하려 들면 수익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기금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만 높이면 기금 고갈 연도를 5년가량 늦출 수 있다. 2057년 완전 고갈 위기를 맞은 국민연금의 재정 개혁에 지배구조 개편이 필수인 이유다. 현재의 지배구조를 보완하거나 개선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 2017년 전주 이전 후 심각한 전문 인력 이탈 사태를 겪고 있는 기금운용본부의 경쟁력 강화 방안도 필수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금 개혁을 교육·노동과 함께 3대 과제로 제시했지만, 연금 제도 개선안 마련 시기를 내년 하반기로 미뤄놓고 있다. 총체적 개혁 프로그램을 당장 내놓지 못할 형편이라면 국민연금의 지배구조 개편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지배구조 개선 없는 연금의 재정 개혁은 헛구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