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있는 영화들은 그동안 거의 똑같은 삶을 살았다. 일단 태어나면 전국 주요 영화관에서 관객과 만난다. 극장에 빈 좌석이 늘기 시작하면 영화는 인터넷TV(IPTV)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주문형비디오(VOD)’ 섹션으로 자리를 옮긴다. VOD 주문이 거의 사라지면 그제야 OTT의 플레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다. 마지막엔 ‘명절 특별방송’으로 지상파와 케이블TV 화면을 장식한다.
오랜 기간 영화계의 ‘불문율’처럼 지켜져 온 콘텐츠 방영 순서(극장→VOD→OTT→지상파)가 깨지고 있다. 지난달 3일 개봉해 지금도 극장에 걸린 ‘비상선언’이 7일부터 토종 OTT 쿠팡플레이에서 추가 비용 없이 공개된 것. 다른 토종 OTT인 티빙은 ‘케이블TV의 몫’이었던 대중가수 콘서트와 스포츠 경기 중계에 열을 올리고 있다. 몸집을 불리려는 토종 OTT의 공격적인 콘텐츠 확보 전략에 방송 시장이 지각변동하는 모양새다.
7일 콘텐츠업계에 따르면 쿠팡플레이는 이날부터 송강호, 이병헌 등이 출연하는 여름 대작 ‘비상선언’을 단독 공개한다. 한 달 이용료 4990원을 내는 쿠팡와우 회원이라면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쿠팡플레이가 독점권을 따낸 만큼 비상선언은 향후 IPTV의 VOD 섹션에서도 빠진다. 쿠팡플레이는 지난달 29일엔 700만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을 단독 공개했다.
앞서 지난해 CJ ENM의 영화 ‘서복’(2021) 등이 극장과 티빙에서 동시 공개됐지만, 이는 코로나19 여파로 극장이 ‘개점휴업’한 걸 고려한 고육지책이었다. 쿠팡이 비상선언과 한산의 판권을 매입한 것과는 개념이 다른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쿠팡이 비상선언과 한산 제작사 측에 유료 VOD 수입을 뛰어넘는 금액을 제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OTT의 공세는 영화를 넘어 공연과 스포츠 중계로 확대되고 있다. 티빙은 지난달 가수 임영웅의 공연을 단독 실황 중계했다. 임영웅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티빙은 라이브 생중계 중 가장 높은 유료 가입자 수를 기록했다. 웨이브는 지난달 K팝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한 ‘서울페스타 2022’ 행사를 독점 공개했다.
스포츠 부문에선 쿠팡플레이와 티빙이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쿠팡플레이는 지난 7월 손흥민의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의 방한 경기를 독점 생중계했다. 9일 열리는 미국 내셔널풋볼리그(NFL)도 단독 중계한다. 티빙도 독일 분데스리가 경기를 비롯해 주요 스포츠 경기를 독점 중계하고 있다.
토종 OTT들이 영화, 공연, 스포츠 중계 독점권에 매달리는 건 글로벌 OTT와 맞설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자체 제작한 콘텐츠만으론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와 맞서는 게 버거운 상황이다. 업계에선 OTT들의 콘텐츠 확보 경쟁으로 인해 극장, IPTV, 방송 등 기존 플랫폼을 ‘패싱’하는 현상이 한층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제작사와 배급사 입장에선 새로운 수익원이 생겼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며 “하지만 극장에서 상영하는 작품을 OTT가 동시에 방영하면 극장이 설 땅은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