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아시아 미술시장 허브’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시입니다. 싱가포르처럼 (주로 한·중·일 3국에 있는) 작가 및 컬렉터와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도쿄에 비해 의사소통(영어) 문제도 덜하죠. 그럼에도 굳이 단점을 꼽자면…. 글쎄요, 교통체증? 하하.”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의 아시아지역 총괄사장인 프랜시스 벨린(사진)은 지난 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최근 20년 사이 세계의 주류 문화로 성장한 것처럼 세계 미술계에서 서울과 한국 작가들이 차지하는 위상도 크게 높아질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인터뷰는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의 서울 진출을 맞아 크리스티가 마련한 특별전 ‘육체와 영혼: 베이컨/게니’가 열리고 있는 서울 청담동 분더샵에서 했다.
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여러모로 특이하다. 20세기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프랜시스 베이컨과 초현대미술의 대표주자인 아드리안 게니의 작품이 8점씩 걸렸다. 전시작 추정가는 4억4000만달러(약 6000억원)에 이른다. 이름값과 작품값 모두 ‘역대급’이다. 하지만 관람료는 없다. 기간은 단 3일이고, 작품은 판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가 경매와 무관한 기획전을 국내에서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벨린 사장은 “크리스티가 서울을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고 설명했다. “다른 거 다 빼고, 보험료와 운송료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었어요. 하지만 프리즈 서울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함께 열리는 ‘미술 축제기간’에 한국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크리스티도 한국 미술시장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벨린 사장은 “아직까지 아시아 미술의 중심지는 홍콩”이라고 했다. 지난 20여 년간 아시아 미술시장의 허브 역할을 해온 덕분에 상당한 인프라와 노하우가 구축됐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크리스티의 아시아 전략은 홍콩을 더 키우는 것”이라며 “지난해 홍콩에 아시아 첫 경매 전용 건물을 짓고 연중무휴 경매를 선보이기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직 서울에서 직접 경매를 열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벨린 사장은 “서울이 도쿄, 싱가포르에 비해 여러모로 여건이 좋긴 하지만,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미술 챔피언’이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뉴욕과 런던도 세계 예술의 중심지가 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방탄소년단(BTS)과 ‘오징어 게임’ 등 대중문화의 힘이 세계 최강인 만큼 다른 도시에 비해 이런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대중문화가 그랬듯이 한국 순수예술의 영향력도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자산가치 하락이 세계 경제를 집어삼키는 상황에서 미술시장은 어떻게 움직일까. 벨린 사장은 “고가 미술품 경매시장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세계 경제가 침체를 겪을 때도 고가 미술품 가격은 오히려 올랐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일반 미술시장의 경우 실력을 인정받은 작가들의 작품은 살아남겠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은 가격이 급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20여 년간 미술시장에서 일하면서 ‘지금 작품을 사도 되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답은 똑같습니다. ‘누가 뭘 그렸는지가 중요하다’고요. 실력 있는 작가가 공을 들인 작품은 시장 상황이나 가격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구입하세요.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저렴해도 지갑을 열지 마세요. 특정 작가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구입해선 안 됩니다.”
최근 가격이 급락한 대체불가능토큰(NFT)에 대해 크리스티는 어떻게 생각할까. 벨린 사장은 “크리스티는 앞으로도 NFT를 비중 있게 취급할 것”이라고 했다. 15세기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발명으로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었던 것처럼, NFT의 등장으로 미디어아트 등 디지털 예술의 발전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만 벨린 사장은 “NFT 역시 누가 뭘 그렸는지를 잘 보고 사야 한다”며 “작가와 작품 수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