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9월 02일 14:4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요즘 어딜 가나 "돈줄이 말랐다"고 아우성입니다. 우리나라의 플랫폼 기업들은 돈줄이 막히고 심지어 구조조정까지 내몰리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금리를 인상 중입니다. 전 세계가 미국 연준 의장의 말 한마디에 긴장합니다. 이제 일반인들도 '빅스텝'이니 '자이언트 스텝'이니 하는 용어에 익숙합니다. 작년 말에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들입니다.
지난해 전 세계 벤처캐피털(VC) 투자 규모는 6000억여달러로, 10년 전의 10배로 증가했습니다. 기업가치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올 들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미국 나스닥 지수는 30% 가까이 빠졌고, 기업공개를 통해 조달된 자금은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사모펀드 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급 저리 자금을 기반으로 수익률을 끌어올렸던 투자 시장은 금리가 오르자 얼어붙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지난 20년 간의 사건에서 단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닷컴버블. 20세기 말 인터넷 기술 광풍으로 금융시장이 얼어붙었던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새 천년' 개막과 함께 중국이 세계 경제에 편입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열리고 위기가 진정되었습니다. 미국 실리콘벨리에서 촉발된 불길이 중국 덕분에 가라앉았습니다.
둘째, 금융위기. 21세기 들어 세계 경제는 중국 개방으로 거침없이 성장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외환위기 충격에서 벗어나 제법 탄탄해졌습니다. 중국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덩치가 커졌습니다. 금융산업도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 뉴욕발이었습니다. 100여년 전 대공황 이후 닥쳐온 최대 재앙을 막겠다며 각국이 돈을 무제한으로 뿌렸습니다. 그 무렵 애플을 위시한, 지금 천문학적인 몸값을 자랑하는 빅테크들이 디지털혁명의 물결을 타고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코로나 팬데믹. 금융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마이너스 금리까지 감수하며 살포된 자금 덕에 가까스로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디지털 전환이라는 분위기도 작용했습니다. 주식시장은 물론이고 부동산 시장도 뜨거워졌습니다. 가상화폐도 끼어들었습니다. 이쯤 되자 돈 살포에 앞장섰던 미국이 돈줄 조이기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팬데믹이 엄습했습니다. 돈줄을 조이기는커녕 돈을 더 풀어야했습니다. 돈은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으로 쏠렸습니다. 빅테크와 대기업들은 저리로 자금을 비축했습니다. 기술 스타트업들은 천정부지로 몸값을 올리며 돈을 빨아들였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각국이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말 닷컴버블은 인터넷 시대 초기의 '기술버블'이었으나 금융시장 충격에는 '새발의 피'였습니다. 돈이 무제한으로 풀린 건 닷컴버블 이후 1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중국 개방은 금융산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세계는 넓고 24시간 돌릴 카드도 기하급수로 많아졌습니다. 결국 금융위기가 터졌습니다. 이번에는 기술과 거리가 먼 '주택 버블'로 금융시장이 붕괴됐습니다. 이 미증유의 금융위기는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풀리면서 진화되었습니다. 돈에 의해 돈으로 생겨난 상처가 가라앉았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바이러스 팬데믹은 또다른 아이러니를 낳았습니다. 돈줄을 조여야 하는 상황에서 돈이 더 풀리자 플랫폼과 바이오 비즈니스가 들썩였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유동성으로 주식시장이 뜨거워지고, 스타트업 기업가들은 그런 주식시장을 바라보며 꿈에 부풀고, 투자자들은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다들 주체할 수 없는 돈으로 지어진 '종이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기술도 주택도 아닌 '팬데믹 버블'이었습니다. 그러다 인플레이션이라는 폭우가 내리자 집이 쓸려나갔습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플랫폼과 바이오 기업 가치가 폭락하고, 자금시장이 얼어붙었습니다.
도대체 그 많던 돈이 어디로 갔을까요? 지난 15년간 미국은 통화량이 세 배로 늘어난 반면 국내총생산(GDP)은 1.5배 증가에 그쳤습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통화량 대비 GDP 비율, 소위 돈의 가성비도 93%에서 62%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돈이 산업 생태계 바깥에서 노닐다가 버블이 꺼지자 자갈밭에 스며들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돈은 또다시 버블을 올라타고 대박을 노릴 기회를 엿보며 잠을 잡니다.
세계적인 사모펀드운용사 칼라일의 데이비드 루벤스타인 회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최근 우량기업조차 시장의 외면을 받아 주가가 크게 떨어졌다"며 "기술주를 쓸어 담을 절호의 기회"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은 팬데믹 상황에서도 곳간을 두둑하게 채워 둔, 공급망 붕괴와 인플레이션에서 자유로운 기업이나 슈퍼리치들에게나 해당됩니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물론이고, 인플레이션 두려움에 떠는 개인들에게는 언강생심입니다.
전 미국 재무장관 로렌스 서머스는 '구조적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를 주장합니다. 100여 년 전에 생겨난 용어가 새삼스레 조명을 받는 건 경기침체의 본질 때문입니다. 경제가 성숙단계에 이르면서 만성적인 수요 부족과 기업의 투자회피 때문에 장기침체에 빠졌다며, 이를 탈피하려면 '정부 주도의 인프라 투자'라는 마중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지난 20여년 간의 돈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넘쳐나는 돈이 산업 생태계의 선순환과 거리가 먼,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것"에 불과했던 겁니다.
이 와중에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이 눈길을 끕니다. 이 법의 핵심은 정부 주도로 기후변화 대응과 민간 수요 진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것입니다(물론 중국 견제 목적도 있습니다). 기후변화 대응에 가장 미적거렸던 미국이 전기차 같은 저탄소 제품 수요를 자극하고 기업의 친환경 기술 투자를 독려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건강한 공급 생태계 조성을 통해 장탄탄한 수요를 이끌어내겠다는 의지입니다.
영화 '놉'에서 사람들은 거대한 외계 생명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그런 괴물을 앞세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주프는 제물이 된 반면, 괴물의 본질을 꿰뚫고 맞선 O.J는 공포를 극복하고 살아남습니다. 인플레이션이나 금리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나, 사실 사람들 스스로 마술지팡이로 버블을 버무려내서 유발시킨 것입니다. 그러기에 버블을 걷어내고 마술지팡이를 버리는 것도 사람들의 몫입니다. 돌고 도는 게, 참 변덕스러운 게 돈입니다.
*필자는 삼일회계법인과 KDB산업은행에서 근무했으며 벤처기업 등을 창업·운영하였습니다. 현재는 사모펀드 운용사 서앤컴퍼니의 공동대표로 있습니다. <슈퍼파워 중국개발은행>과 <괜찮은 결혼>을 번역했고 <디지털 국가전략: 4차산업혁명의 길>을 편역했습니다.
정리=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