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IMF(국제통화기금)에서 왔습니다.”
지난 25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을 지낸 이창용 한은 총재가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IMF가 권고하는 최대치에 한참 미달한다는 일각의 지적을 반박하면서다. 긴장감이 돌던 기자간담회장엔 잠시 웃음이 터졌다. 이 총재는 “한국은 외환보유액이 전 세계 9위”라며 “IMF 기준 최대치를 쌓는다면 비용도 크지만 IMF가 찾아와서 하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거침없고 명확한 화법취임한 지 130여 일이 된 이 총재가 거침없고 명확한 화법을 구사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구체적인 설명과 수치를 친절하게 제시하며 통화정책을 예고해 비교적 잡음 없이 금리인상기를 지나고 있다는 게 시장에서 나오는 대체적인 평가다.
지난 기자간담회에서는 이 총재의 ‘친절함’이 정점에 달했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당분간 0.25%포인트씩 올리는 것이 기조”라고 강조했다. 연내 추가적인 빅스텝(기준금리 한 번에 0.5%포인트 인상) 가능성을 일축하는 발언이었다. ‘당분간이 얼마 동안이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3개월 범위로 생각한다”고 했다. 한 시장 관계자는 “연말 연 3% 기준금리를 기정사실화한 것으로 해석한다”며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예고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가 30일 미국 중앙은행(Fed)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엄 ‘잭슨홀 회의’에 참석한 뒤 복귀하자마자 한 일은 공보관을 통해 언론에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이 총재는 문자메시지에서 “(회의 결과가) 예상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향후 통화정책 운용 방향에도 변함이 없다”고 했다. 금통위 후 불과 5일 만에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지침)’를 추가로 내놓으면서 잭슨홀 회의 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장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전임 총재 장점 합쳤다”이 총재의 스타일은 전임 총재들과도 다른 모습이다. 이주열 전 총재는 일선 부서와 사전 조율한 발언만 내보낼 정도로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중수 전 총재는 화법은 현란하지만 내용은 모호한 탓에 시장이 혼란을 겪었다. 이성태 전 총재는 간결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내놨으나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또 다른 시장 관계자는 “이 총재는 전임 총재들의 장점을 모두 합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이 총재의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화법은 그의 이력과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 총재는 서울대 교수를 지낸 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 IMF 아·태국장을 거쳐 국내외 네트워크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런 네트워크를 활용해 글로벌 경제 변화에 대한 발 빠른 정보를 직접 주고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IMF가 오는 10월부터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여러 시나리오를 반영해 발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힌 것도 그런 사례다. 친절하지만 불안하기도이 총재의 친절하고 위트 있는 화법이 ‘오럴 리스크(설화 위험)’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지난 기자간담회에서 ‘시장은 내년에 금리인상 가능성이 없다고 전망한다’는 기자의 말에 이 총재는 “워낙 불확실성이 심한 상황에서 내년 금리를 어떻게 할지는 깊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답했다.
문제는 그다음 말이었다. 이 총재는 “연말 이후에 금리를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 투자자가 있으면 자기 책임하에 손실을 보든지 이익을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3년 만기 국고채 금리가 하루 사이 0.2%포인트나 급등하는 등 채권시장이 발칵 뒤집혔다. 시장에서는 “이 총재가 기대인플레이션을 반드시 꺾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자신의 발언이 시장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 총재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느낌”이라며 “실수에 가까운 발언”이라는 정반대 평가도 나왔다.
이 총재가 금통위 전 ‘포토타임’에서 의사봉을 두드려 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이번에 올리는 금리는 가짜입니다”라고 농담한 것을 두고도 뒷말이 나왔다. 한 시장 관계자는 “이 총재가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한 것이지만 금통위 의결 전에 ‘진짜’ 금리 인상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기준금리는 시장 참여자에게 공평하게 알려야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