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나라의 의사결정을 대신 해주는 나라를 제국이라고 부른다. 재미있으라고 지어낸 말이 아니다. 제국을 뜻하는 ‘empire’는 라틴어 동사 ‘imperare’에서 파생한 말로 원래의 의미는 ‘명령하다’ ‘지시하다’이다. 그렇다고 제국을 지배와 권리 대행의 폭압적인 존재, 영토와 자원에 환장한 약탈자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런 제국은 아무리 강성해도 문 닫는 데 한 세기도 걸리지 않는다. 제국은 식민지에 ‘제약’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 지배당함으로써 얻는 이익이 굴종의 스트레스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을 때 제국은 첫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여기에 포용과 관용이 토핑되면서 비로소 롱런 가도에 진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피정복 민족을 동물이나 식물 다루듯 하라고 조언했지만 제자는 스승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조언대로 했더라면 그의 제국은 암살과 폭동으로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로마제국의 지배 이념은 윤택하고 편리한 생활 방식의 유혹이었다. 알프스 북쪽과 지중해 서쪽의 식민지들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긴 대신 도시와 목욕과 청결을 얻었다. 윈스턴 처칠이 로마가 브리타니아에 상륙했을 때 드디어 영국에 문명이 시작됐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겠다.
중세 끝 무렵 시작된 대항해시대는 대륙과 대륙에 걸친 제국이 다시 등장한 시기다. 오스만제국이 동지중해를 봉쇄하자 ‘지중해만 바다냐 대서양도 바다다’ 하며 서쪽으로 훌쩍 나가 버린 일이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개막한 대항해시대는 세계를 하나로 연결한 문명사적 사건이었지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는 헬 게이트가 열린 셈이고 두 제국이 직접 듣지도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실천하는 동안 식민지인들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모호한 지위 사이에서 말라 죽었다. 뒤를 이은 영국은 식민지 인민을 위한 자유의 제국을 세우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영토라는 욕망 앞에서 기개는 부식되고 노예 제도라는 이익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노예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위해 노예에게 동물에게 붙이던 이름을 지어줬다. 영국이 노예제도에서 탈출한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그 기간 식민지에 ‘기회’는 없었다. 포용과 관용 대신 무자비한 포교만 있었다. 자유의 실종과 인신의 제약만 넘쳐났던 무책임한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아홉 명의 군주가 왕좌를 상실한다. 군주들의 노조인 거대하고 촘촘한 왕조 네트워크도 붕괴됐다. 더 이상 제국이 나올 수 없는 이 시기에 그러나 지각생 제국이 두 개나 탄생했다. 독일의 제3제국과 대일본제국이다. 나치는 중세시대 피오레의 요하킴의 신학이론을 원용해 인류사의 제국을 셋으로 설명했다. 성부(聖父)가 창조한 구약시대의 제국과 성자(聖子)가 다녀간 신약시대의 제국 마지막이 앞으로 성령(聖靈)이 건국할 구원의 제국이다. 이걸 나치는 입맛에 맞게 재단했다. 신성로마제국이 1제국,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이 2제국 그리고 자기네가 3제국이라는 주장이다. 제3제국 시대에 기회는 있었는가. 그들이 점령한 영토에서 삶의 질이 개선된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청소만 했다. 민족을 청소했고 사상을 청소했다. 슬라브족(소련)에 대해서는 노예화가 목표였다. 주변에 오로지 고통만 주고 떠난 게 히틀러와 제3제국이었다. 대일본제국은 어떨까.
기회라는 측면에서 나는 민간인 최초의 여성 비행사 박경원을 떠올린다. 박경원이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이 1927년으로 일제가 아니었더라면 조선에서 여성이 비행사가 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사례가 떠오르지 않는다. 1945년 광복이 됐을 때 4년제 대학을 나온 조선인은 205명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기회와 포용과 관용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다고 본다. 1946년쯤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데 현실에서 실현됐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로마는 바로 옆의 산악 민족 삼니움과 40년이나 전쟁을 했지만 승리한 뒤 바로 시민권을 나눠줬다. 종전 20년 후 오타릴리우스 크라수스라는 사람이 로마 집정관 자리에 오른다. 그는 삼니움 농부 출신이었다. 35년의 시간이면 일본 내각에 조선인 몇은 들어가 있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일본 원로 정치인이 일본이 한국의 형님뻘이라고 말해 큰 웃음을 줬다. 이 분 눈에는 국제사회가 고아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일 관계를 불가역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드는 일본의 이런 정서에 화답하는 게 한국의 가해자, 피해자 프레임이다. 역사에서 분노를 배우는 것은 정신건강에 해롭고 지력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둘의 목소리는 높아 한·일 관계의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형님뻘이라고 했으니 묻는다. 형이면 동생에게 잘해줘야 하지 않나? 자기는 라면 먹고 동생은 자장면 사주는 게 형의 도리 아닌가? 문득 태진아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제국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남정욱 작가·전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