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강타한 인플레이션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경기침체 우려 속에 고물가의 주범이던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고 있어서다. 코로나19로 촉발됐던 공급망 병목현상이 해소되면서 물류비 부담도 낮아지고 있다. 다만 인건비 등 물가 자극 요인이 여전한 만큼 각국 중앙은행이 빠르게 긴축의 고삐를 풀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하락하는 원자재 가격블룸버그는 JP모간 자료를 인용해 올 하반기 세계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기 대비 5.1%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29일 보도했다.
원유, 밀, 구리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서 물가 상승세가 상반기 대비 절반가량 꺾일 것이란 관측이다. JP모간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유럽을 비롯해 인플레이션 완화 속도는 각기 다를 것”이라면서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 열기는 식어가고 있다”고 했다. 특히 달러 강세 덕에 미국의 인플레이션 완화 속도가 선진국 중 가장 빠를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 경기가 부진의 늪에 빠지면서 원자재 가격은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국제 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 가격(10월물)은 런던ICE거래소에서 지난 26일 배럴당 99.01달러에 마감했다. 지난 6월 초 대비 15% 가까이 하락했다. 90달러대 중반에 거래되던 우크라이나 전쟁(2월 24일) 직전과 비교해 가격 차이가 5달러 내외로 좁혀졌다. 구리와 밀 가격도 3개월 전보다 각각 14.1%, 22.6% 떨어졌다.
‘상품’에서 ‘서비스’로 소비 패턴이 변화하는 것도 원자재 가격 하락세를 부추기고 있다는 분석이다. 코로나19 확산 당시 소비자들은 컴퓨터와 같은 상품 구매를 늘렸다. 감염 우려에 식당, 호텔 등 서비스 이용이 어려웠던 탓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완화하면서 서비스 이용률이 높아지고, 상품 소비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다.
물류대란이 개선되면서 공급 측면의 인플레이션 압력도 낮아지고 있다. 뉴욕연방은행에 따르면 글로벌공급망압력지수는 최근 2021년 초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해상 운송 시간이 짧아지고 운임도 하락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이 같은 요인을 짚은 뒤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이 보기엔 아직 높은 수준의 물가지만 인플레이션이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했다. 긴축 기조 바뀌기엔 일러인플레이션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인력난 속에 인건비가 상승하고 있어서다. 기업들은 높아진 인건비를 상쇄하기 위해 판매가격 인상에 나설 수 있다. 로버트 덴트 노무라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임금 인상이 추가적인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우려하고 있다”며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또 미국의 임대료 상승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할 수 있다고 골드만삭스는 설명했다. 물가 상승세가 누그러진다 해도 코로나19 사태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긴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 완화 신호에도 세계 중앙은행들은 당분간 기준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26일 미국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기준금리 인상은 가계와 기업에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면서도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기준금리를 계속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자벨 슈나벨 유럽중앙은행(ECB) 집행이사도 “각국 중앙은행들이 강력하게 행동해야 한다”며 금리 인상을 지지했다.
채권 투자자들은 내년 3월까지 Fed가 기준금리를 연 3.75%까지 올릴 것이라는 데 베팅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현재 미국의 기준금리는 연 2.25~2.50%다. 존 플래히브 BNY멜론자산관리 투자책임자는 “현재 인플레이션은 중앙은행의 목표치를 훨씬 웃돈다”며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낮추고 인플레이션이 다시 상승하는 것을 지켜보는 실수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