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베드로다"…바티칸서 유흥식 추기경 서임식 열려

입력 2022-08-27 23:45
수정 2022-09-23 22:30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흥식(71)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의 머리에 붉은색 사제의 모자 '비레타(biretta)'를 씌웠다. 이 순간 한국 천주교 역사상 네 번째 추기경이 탄생했다. 붉은 비레타는 추기경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를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고 때로는 피를 흘릴 준비까지 돼있다는 의미다.
추기경은···교황 다음으로 높은 자리이날 현지시각 오후 4시(한국 시간 밤 11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 추기경을 비롯해 20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는 서임식을 주례했다. 앞서 5월 29일에 발표된 신임 추기경은 21명이었으나, 원로 성직자인 루카스 반 루이 주교(벨기에 겐트 전임 교구장)가 스스로 임명을 고사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를 받아들였다.

추기경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가진 자리다. 종신직이다. 세계 추기경 수는 신임 추기경 20명 포함 226명이다.

세계 모든 추기경이 모인 추기경단은 교회법상 교황의 최고 자문기관이다. 80세 미만의 추기경은 교황 유고 시 새 교황을 뽑는 투표인 ‘콘클라베(conclave)’에서 한 표를 행사한다. 유 추기경도 80세를 넘기기 전까지는 투표권을 갖는다.

"너는 베드로다"“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리라.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서임식을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자 신자들은 마태복음 16장 18~19절을 담은 노래(입당송)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구절은 예수가 시몬에게 '베드로(반석)'라는 이름을 주는 내용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수제자로서 초기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최초의 교황이라고도 한다. 성 베드로 대성당 천장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는 이 구절은 모든 가톨릭교회 조직의 시작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루카복음 12장 49~50절("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를 전하며 "추기경은 일상의 문제를 다룰 때나 권력자를 대할 때나 평범한 신자를 마주할 때나 언제나 똑같은 영적 불길로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서임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새 추기경들이 한 명씩 교황 앞에 무릎 꿇고 빨간색 비레타와 추기경 반지, 칙서를 받는 순간이었다. 유 추기경은 영국의 아서 로시 신임 추기경에 이어 두 번째로 비레타를 받았다.


추기경의 오른손 약지에 끼워주는 반지는 베드로의 후계자(교황)와의 친교를 의미한다. 그래서 반지 안쪽에는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칙서는 신임 추기경 각자에게 로마의 성당 한 곳씩을 명의 본당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린시절 가난 딛고 '베푸는 삶' 꿈꿔

유 추기경은 역대 네 번째 한국인 추기경이다. 지금까지 한국인 추기경으로는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1922∼2009)·정진석 니콜라오(1931∼2021)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79) 추기경이 있다.

1951년 충남 논산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유 추기경의 어린 시절은 혹독했다. 젖먹이 시절 아버지를 잃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홀로 3남매를 키워내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가난하고 외로웠던 소년은 성당에서 위안을 얻었다. 유 추기경은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뜻을 기려 세운 논산 대건고 출신이다. 고등학교 1학년때 가톨릭교회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됐다. 당시 그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던 수녀들의 권유로 봉사하는 사제의 삶을 꿈꾸게 됐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이탈리아로 유학을 가 현지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83년 이탈리아 로마 라테라노대에서 교의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라테라노대는 교황청 산하 대학이다.

그는 이후 대전 대흥동 본당 수석 보좌신부, 솔뫼성지 피정의 집 관장, 대전교구 사목국장, 대전가톨릭대 총장 등을 거쳐 2003년 주교로 서품됐다. 2005년부터 대전교구장을 맡아왔다.

세례명은 '라자로'. 수도원 성당 근처 기둥 위에 오두막집을 짓고 고행생활을 자처한 가톨릭 성인이다.


유 추기경은 지난해 6월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임명됐다. 세계 사제·부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자리다. '깜짝 발탁'이었다. 교황청 역사상 한국인 성직자가 차관보 이상 고위직에 임명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황청 행정기구인 9개 성(省·congregations)의 장관은 대부분 추기경이라 이번 추기경 임명은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다만 대교구장이 아닌, 교구장이 추기경 자리까지 오른 건 이례적인 일로 꼽힌다. 그간 한국에서 서임된 추기경은 모두 서울대교구장 출신이었다.
교황청-한국 천주교 간 소통 강화 기대유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과 가깝게 소통하는 몇 안 되는 한국인 성직자 중 한 사람이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기까지 유 추기경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 교회 간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이날 유 추기경의 서임식에는 한국의 염수정 추기경(2014년 서임)도 추기경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장 이용훈 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도 서임식에서 유 추기경의 서임을 축하했다.

전병극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대표단도 이 자리에 함께 했다. 대표단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윤석열 대통령의 축하 서한도 전달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유 추기경 서임과 내년 한국-교황청 외교관계 수립 60주년을 계기로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