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임진왜란으로 최대 10만명 안팎의 백성이 포로가 돼…마카오·인도·이탈리아·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가

입력 2022-08-29 10:00
정권과 나라는 붕괴해도 괜찮다. 이민족, 다른 국가에 지배받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백성은 죽어서는 안 된다. 백성이 살아야 새 세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두고 다양한 평가가 있다. 일본은 전쟁 결과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정권이 교체됐다. 명나라는 파병 목적을 이룬 대신 멸망이 앞당겨졌다. 만주의 여진족은 어부지리를 얻어 청 제국을 건설했다.

침략을 받아 전장이던 조선은 승전이라는 자기기만에 빠졌다. 의병장들과 백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고, 끌려간 포로를 내버렸다. 교토 시내의 ‘미미쓰카(耳塚)’라는 크지 않은 무덤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베어온 조선인의 귀 5만 명분이 묻혀 있다고 한다. 포로는 적게는 2만~3만, 많게는 10만 명이 넘고, 그 가운데 7500명 정도만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국에 귀환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포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고, 책임져야 할 조선 정부는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전쟁은 고도의 정치행위, 경제행위며 또한 문화행위다. 그 때문에 사람의 약탈이 있었고, 노예무역이 병행됐다. 일본군은 정치적인 영토 외에 자원과 문화재 약탈, 포로 획득을 목적으로 군대 체재까지 개편했다. 그 결과 학자, 의원, 도공 등의 기술자와 농민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 적선에 실린 채로 대한해협을 건너 적지에 내팽개쳐진 조선 포로들의 운명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첫째, 대부분은 귀환을 체념한 상태로 정착해 일본인으로 변신했다. 노비를 비롯한 천민은 물론이고, 진주성 전투에 참여한 홍호현 이성현 등의 양반도 정착해 상급 무사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무렵 일본의 여러 곳, 특히 규슈에는 조선 포로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됐고 일부는 일본인의 가정 노예로 변했다. 세월이 흘러 조선통신사들이 도착했을 때 애까지 낳은 조선 여인들이 행렬로 다가와 향수를 하소연하기도 했다. 대마도의 바닷가 마을인 우나쓰라(女連)에는 선조의 딸인 옹주의 무덤이 잊힌 채로 남아 있다.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姜沆)은 귀국해서 쓴 《간양록》에 대마도에 있는 많은 사람이 조선 의복과 언어를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포로로 붙들려간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처참한 증언이다.

기술자로 정착한 사람도 많았다. 일본은 다도와 무역 상품 수요로 수준 높은 도자기의 필요성이 컸다. 조직적으로 끌려온 도공들은 혼슈 남쪽의 하기(萩), 규슈의 가라쓰(唐津), 아리타(有田), 사쓰마(薩摩) 등에서 가마를 열고 도자기를 생산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이마리항과 나가사키항을 통해 1650년부터 한 세기 동안 아리타 도자기를 520만 점이나 유럽으로 수출했다.

또한 많은 포로가 자의 또는 타의로 천주교인이 됐다. 나가사키에만 세례자가 1300여 명이었고, 1610년에는 고려정(마을)에 성당을 건축했을 정도다. 막부의 억압으로 많은 조선인 순교자가 나왔다. 그 예로 오타 줄리아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어린 양녀로 들어가 천주교 세례를 받고, 절해고도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가장 불행한 운명을 맞이한 포로는 해외에 노예로 팔려나간 사람들이다. 일본,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청나라 상인에 의해 마카오, 동남아시아, 인도,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지로 팔려나갔다. 루벤스가 그린 소묘의 모델로 알려진 안토니오 코레아는 이때 이탈리아로 팔려간 인물이다.

탈출을 시도해 귀환에 성공한 일부 포로도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1600년 2월 29일 옥포에는 ‘남녀노약’ 30구 조선인 포로들이 탈출해서 생환했다. 그해 4월 27일 조정에 보고된 내용인데,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김학성 등 남녀 21명은 오사카부터 대마도를 거치지 않은 채 곧장 동쪽 바다(동해)를 건너 귀환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교류하면서 정보를 주고받았으며, 일본 상황을 국내에 비밀리에 보고했거나 귀국 후에 보고했다. 도망쳐온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은 분열됐고, 앞으로 조선엔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