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혜 작가 "그림 덕에 동굴서 나왔죠"

입력 2022-08-24 15:08
수정 2022-08-24 15:24
"기분이 딱, 좋아요."

정은혜 작가는 24일 첫 그림에세이책 <은혜씨의 포옹> 출간 기념 기자회견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주황색 표지가 마음에 든다"며 이 같이 말했다. 이날은 정 작가의 그림 전시회 개인전 '포옹전' 첫 날이었다. 포옹전은 서울 인사동 토호하우스에서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발달장애(다운증후군)를 갖고 있는 정 작가는 화가인 동시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이름을 널리 알린 배우다. 이날 전시장에는 '우리들의 블루스'에 함께 출연한 김우빈 배우 등이 보낸 화환이 놓여 있었다.

정 작가는 "꽃도 보내주고 잘해줘서 고맙다"며 "(드라마를 쓴) 노희경 작가님도 이런 좋은 드라마에 섭외해주고 따뜻한 말을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경계 허무는 '은혜씨의 포옹' 책과 전시의 주제는 '포옹'이다. 정 작가는 "아는 사람이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 반가운 사람들, 만나서 포옹하자(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정 작가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을 안아주는 게 좋아요. 사람을 안으면 제가 따뜻해지죠. 따뜻하면 기분이 좋아요. 포옹은 사랑이에요."

어머니이자 만화가인 장차현실 작가는 "이번 전시회를 위해 은혜씨의 그림과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사람들과 찍은 사진, 특히 포옹한 사진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거리 두는 게 예의인 세상에서 포옹은 우리에게 그리운 몸짓"이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장차 작가는 딸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은혜씨'라고 부른다.

"포옹은 사람과 사람 사이 경계를 허무는 몸짓 같아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손 하나 잡는 데도 많은 생각을 하잖아요. 은혜씨는 그런 게 없어요. 은혜씨가 다른 사람을 푹 끌어안을 때, 사람 간의 관계를 두고 긴장해있던 그 사람의 마음이 확 녹아내리죠."

<은혜씨의 포옹>에 수록된 그림 중에는 김우빈, 한지민 배우 등을 그린 그림도 있다. 정 작가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렸다"고 했다.

그림 그리며 동굴 밖으로이런 정 작가도 한때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는커녕 타인의 눈조차 마주치기 어려워했다. 학교, 지하철 등에서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에 시달리며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시선 강박'을 겪었다. 결국 학교 생활을 중도 포기하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했다. 조현병, 틱 증세도 나타났다.

정 작가는 이때의 절망을 '동굴'이라 표현했다. "갈 데가 없었어요. 직장도 없었고 그냥 아무 것도 안 했어요. 집 한구석에서 혼자 뜨개질하고, 이불을 덮고 있었죠. 매일매일 동굴 속에서 있었어요."

우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다시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2013년부터 장차 작가의 화실에 나가 청소를 하고 뒷정리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그러다 학생들과 섞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시선 강박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림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위로를 주고 받았다. 양평 문호리에서 열리는 플리마켓(벼룩시장)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처음 본 사람들의 캐리커쳐(어떤 사람의 특징을 강조하며 그리는 초상화)를 그렸다. 당시 간판에 적은 문구는 "예쁘지 않은 캐리커쳐 그려드려요"였다. 정형화된 미인의 모습이 아니라 작가와 모델의 개성을 표현한 그림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렇게 지금껏 그린 캐리커쳐만 4000점이 넘는다.

장차 작가는 "온 가족이 총출동해 캐리커처를 그리도록 지원했다"며 "은혜씨를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가족들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발달장애인 가족은 발달장애인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거든요. 은혜씨가 환청, 환시에 시달릴 때 가족들은 문 밖에서 두 손을 꼭 쥐고 있었어요. 가족들이 살려면 은혜씨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야 했어요."

어머니의 설명을 듣던 정 작가가 옆에서 덧붙였다. "8월 23일이었어." 정 작가는 리버마켓에서 캐리커쳐를 그리기 시작한 날짜를 아직도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의 재능, 직업으로 연계됐으면"발달장애인 중에 정 작가처럼 직업을 갖고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는 드물다. 재능이 있어도 세상 밖으로 꺼낼 기회를 얻기 힘들어서다.

장차 작가는 "그림에 재능이 있는 발달장애인이 많다"며 "아무래도 그림을 그리는 데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보니 집에서 혼자서 그림을 쌓아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했다. 그는 어느 발달장애인의 집에 갔더니 놀라운 그림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모두 농협에서 나눠준 달력 뒷장에 그려져 있더라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발달장애인이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게) 단지 은혜만의 이야기는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됐다"며 "예술활동이 일(자립을 위한 직업)로 연계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했다.

최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흥행하며 장애인과 장애인 가정에 대한 관심도 비교적 늘었다. 이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천재 변호사를 다뤘다. 장차 작가는 "저도 그 드라마를 참 공감하며 봤고, 가끔 드라마 속 아빠처럼 외롭기도 하다"고 했다.

"은혜씨가 사는 세상과 제가 사는 세상의 결이 다르다는 생각도 가끔 해요.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걸 또 이해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슬프지는 않아요. 그런 외로움은 모든 인간이 지고 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유명 만화작가인 장차 작가는 지금은 정 작가를 지원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만화 작업도 중단했다. <은혜씨의 포옹>에는 그런 엄마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담겼다. "엄마는 저를 오랫동안 키우느라 지쳤죠. 발달장애인 투쟁을 위해 삭발도 했어요. 엄마는 저를 위해 애쓰고 힘들었지만…(생략) 멋있는 나의 스타"

이날 간담회에서 "고생 많았어"라는 정 작가의 말에 장차 작가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나 장차 작가는 "이제 은혜씨에게 제일 중요한 사람이 제가 아니었으면 한다"며 "저 외에 친구, 동료 등 소중한 사람들과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복지 정책이 잘 갖춰지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아니면 말아. 연기도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고. 계속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은혜씨."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