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부동산 정책만큼 실패 반복한 한국 국산화 정책"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2-08-24 06:46
수정 2022-08-24 06:54

"지난 35년간 한국 정부는 '대일 무역적자는 악'이라는 발상에 갇혀 18차례나 소재·부품·장비의 국산화 정책을 반복했습니다. 한일 양국이 구식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덜 못하기 경쟁' 대신 '더 잘하기 경쟁'을 펼쳐야 합니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는 최근 도쿄 와세다대 연구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이렇게 말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자타공인 일본 최고의 한국경제 전문가다. 1983년부터 40년 가까이 한국경제를 연구했다.

후카가와 교수의 말 한마디가 무게감을 갖는 건 책상머리에서의 연구 결과가 아니라 한국 경제를 직접 체험하고 관찰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산업연구원(KIET)과 같은 국책연구소와 연세대 고려대 등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지금도 매년 한국을 방문해 최신 상황을 업데이트한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슈퍼 파워'에 낀 한국과 일본이 라이벌 의식을 적절히 살리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게 중요하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한일관계가 악화한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대일 무역적자는 악'이다. '한국은 일본에서 막대한 양의 소재와 부품을 수입하는데 일본은 한국 제품을 사지 않는다. 그러니 빨리 국산화해서 수입을 줄여야 한다'는 발상은 지난 35년간 전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대일 무역적자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한국 기업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게 최우선이니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기업, 일본 기업 가릴 것 없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소재·부품·장비를 조달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살아남으니까요."


▶한국 정부가 지난 35년간 소부장 국산화 정책을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만큼이나 반복했다면서요.

"대규모로 추진한 한국 정부의 소부장 국산화 정책만 18회였습니다. (국산화의 시발점인) 1986~1987년은 엔화 급등으로 경쟁국인 한국의 수출이 최고조였을 때입니다. 수출이 급증하니 설비투자를 대폭 늘려야 했고, 일본의 자본재 수입이 불어날 수 밖에 없던 때였습니다."


▶경제학의 비교우위론에 따라 일본이 강한 소재와 부품, 장비를 구입해 한국이 잘하는 완성품을 만드는게 서로 이익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규제 같은 돌발변수가 이러한 협력관계를 흔드는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규제는 분명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국산화가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글로벌 공급망의 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에 공급망을 국산화해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런가요.

"보조금을 줘서라도 필요한 공급망을 모두 국산화했다고 가정해 보죠. 삼성 같은 대기업이라도 모든 공급망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으니 중소기업에 맡기겠죠. 그런데 이 기업에 사고가 일어나거나, 전력위기가 발생하거나, 북한의 폭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기업은 정부가 시키지 않아도 공급망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이를 방해해서는 안됩니다."


▶현재의 공급망은 기업이 치열한 고민 끝에 만들어낸 최선의 결과물이니 정부가 나설 필요가 없다는 의미군요.

"정부는 시장에서 경쟁하는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어떤 품목의 국산화가 필요한 지, 국산화를 시도했을 때 성공할 수 있는지 모르잖아요. 기업이 정부보다 훨씬 필사적으로 고민합니다. 시장의 메커니즘을 존중하는게 중요합니다."

▶한국의 또다른 과제는 뭘까요.

"상당수 한국인들은 25년도 지난 IMF 위기 당시의 사고방식을 고수합니다. '제조업이 강해야 된다. 부동산만 살리면 경제는 소생한다. 수출만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세가지 통념을 신주단지 모시듯 합니다.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점점 옛날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데 정부의 접근법은 IMF 때와 달라진게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 경제의 강점과 약점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본은 한국보다 중장기적인 사업모델이 어울립니다. 속도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해나기만 하면 보상을 받는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속도가 승부를 가르는 반도체에서 실패한 이유입니다. 한국은 반도체 같이 스피드와 집중력, 위기 관리력 등 순발력을 요구하는 산업에 강점이 있습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기질이 반대여서 잘 조합하면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들 합니다.

"수출규제 대상인 반도체 핵심소재들은 사실 연구개발의 성과를 보상 받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산업입니다. 시장이 워낙 작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양한 재료를 복잡하게 조합하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내일 당장 결과를 내야하는 한국 기업의 문화로는 절대 불가능한 사업이죠. 육상경기에 비유하면 일본은 마라톤, 한국은 단거리 경주에 나서는게 이상적입니다. 아주 좋은 팀이 될 수 있습니다."


▶한일 양국이 서로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반도체 분야에서 매우 이상적인 상호보완 관계가 됐잖습니까. 일본은 단거리 경주의 성격이 강한 D램 반도체를 포기한 대신 마라톤에 가까운 소재·부품·장비에 주력하죠. 한국은 단거리 경주인 반도체를 하구요."

▶한일 양국이 상호보완, 상호의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분야가 또 있을까요.

"한국에서 국산화를 가장 강조한 분야가 자동차 부품산업입니다. 실제로 일본을 많이 따라잡았고요. 하지만 자동차 부품 시장에서도 시장원리가 작동합니다. 국산화보다 수입이 더 유리할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한국 자동차 업체가 일본 부품을, 일본 자동차 업체가 한국산 부품을 많이 사는 이유입니다. 이런 시장에서는 '한국에 졌다, 이겼다'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습니다."


▶반일, 혐한 감정이 두 나라의 발전적인 관계를 막는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일본의 혐한세력은 대부분 나이 먹은 남자들이죠. 일본이 전성기였던 자신들의 젊은 시절과 오늘날 한일 간의 지위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반대로 한국인들은 한국이 이미 일본을 이겼다고 생각하고, 일본의 정보기술(IT) 후진성 등을 깔봅니다. 이러니 서로 부딪칠 수 밖에요. 하지만 기업인들은 혐한, 반일을 따질 처지가 아니에요. 글로벌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기도 벅차죠."


▶양국의 라이벌 의식을 어떻게 발전시키면 좋을까요.

"일본에서도 '한국 덕분에 꼴찌는 면해서 다행이다'라는 풍토가 있습니다. 일본의 출산율은 1.30명으로 위기지만 한국이 0.81명이어서 안도하는거죠. 반대로 남녀평등지수 99위인 한국은 116위의 일본을 앞섰다고 기뻐합니다. 누가 더 나은지를 따지는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비참한 수준인데도요. '누가 덜 못하나'가 아니라 '누가 더 잘하나'를 겨뤄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그런 경쟁이 가능할까요?

"남녀평등, 취업률, 노인복지, 행정효율 등 더 잘하기 경쟁을 할 분야는 엄청 많습니다. 양국 모두 없애야 하는걸 알면서도 기득권의 저항 등 때문에 없애지 못하는 규제가 잔뜩 있잖아요.두 나라의 라이벌 의식을 활용해야죠. 한 나라가 규제완화를 적극적으로 실시해서 성과가 나오면 나머지 나라도 반드시 따라 할 겁니다. 이게 바로 한일 양국이 탈꼴찌 경쟁이 아니라 1등 경쟁(rase to the top)을 하는 겁니다."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세계1위를 목표로 하는 일도 가능할까요.

"'한일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죠. 인간답게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건 양국의 공통 과제입니다. 이 분야에서 누가 더 잘하는지를 경쟁해야 합니다. 환경 분야에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경쟁, 탈석탄사회를 실현하면서 강한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는 경쟁, 개발도상국을 원조하는 경쟁 등 양국이 힘을 합칠 일은 가득합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과 일본이 블록경제권을 형성해서 대응하자고 주장하는데요. 어떤 구상인가요.

"미국과 중국의 경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유럽연합(EU)도 독자적인 블록을 형성하고 있지요. 또 하나는 소위 '미들 파워 급'의 나라들입니다. 한국과 일본, 유럽에서 떨어져 나온 영국, 칠레 페루 호주 뉴질랜드 등 자원대국 등이 포함됩니다. 이 나라들은 독자적으로는 미국 중국과 경쟁이 안됩니다. 대신 이 그룹과 EU가 힘을 합치면 미국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유럽연합(EU)이 힘을 합치는 구도가 되는건가요.

"EU와 TPP의 연합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EU와 TPP, 영국을 합친 경제 규모는 미국과 중국을 넘어서니까요."


▶블록경제권으로 미국 중국 등 세계 양대 파워에 대응하는게 정말 가능한가요.

"한국은 일본과 다툴 때가 아니죠. 미국과 중국이 계속해서 싸우면 가장 곤란한 나라가 한국이잖아요. 하지만 한국 혼자서 미중의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나요. 일본도, 영국도 혼자서는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끼리의 블록경제권도 가능한가요.

"세 나라는 이미 실질적인 블록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죠. 한류드라마의 세계 최대 시장은 일본이잖아요. 일본 TV를 보세요. 일본 방송사들이 낮 시간대에 내보낼 프로그램이 마땅찮으니 줄곧 한류 드라마를 방영하잖아요."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