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후변화 '안전기준' 전면 재조정해야

입력 2022-08-23 17:23
수정 2022-08-24 00:07
폭우로 잠긴 반지하 집에서 가족들이 필사적으로 물을 퍼내고 있다.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속 한 장면이다. 현실의 결말은 최악이다. 115년 만에 기록을 갈아치운 물폭탄으로 반지하 집 일가족 3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지구 반대편은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누적 사망자가 2000명을 넘어섰으며, 도나우강 수위가 100년 만에 최저가 되며 2차 대전 때 침몰한 독일 군함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문제의 심각성은 기록적인 폭염, 폭우와 같은 이상기후가 거의 매년 반복되다시피 하며 일상화하는 징후가 뚜렷해지는 데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2020년 장마는 역대 최장기간 기록을 세웠다. 역대 풍속 순위 7위까지의 태풍이 모두 2000년 이후에 발생했고, 2010년대의 폭염일수도 그 이전보다 5일이나 많은 15.5일을 기록했다. 일상화한 폭우와 폭염은 더 이상 기상이변이 아니라 기후변화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기후변화가 여전히 진행 중이고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기후변화로 인해 폭염이나 폭우, 가뭄 등 기후 재난이 잦아지고 그 강도도 세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한 예측 결과에 의하면 온실가스 배출이 현재와 같이 지속 증가하면 21세기 말 일부 지역에선 하루 강수량 800㎜ 이상의 극한 기후 현상이 발생하고 지구 평균온도가 약 4도 올라갈 수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올해 서울을 강타한 물폭탄의 하루 강수량이 400㎜인 점을 감안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핵폭탄급 폭우다. 반지하뿐만 아니라 저지대 2층 집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말이다.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류가 선택한 대책은 감축과 적응이다. 감축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 기후변화를 근본적으로 방지하려는 노력인 반면, 적응은 일정 수준의 기후변화 추세를 인정하고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의미한다.

기후변화는 지구상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총량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감축은 전 세계가 동참해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지구적 의제다. 우리나라가 큰돈 들여 온실가스 배출량을 완전히 줄여도, 중국이나 인도에서 배출량을 줄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감축 비용은 자국 부담이지만, 감축의 편익은 전 세계가 골고루 누리게 된다. 개별 국가들이 감축에 적극적일 까닭이 없다.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감축에 편승하려는 무임승차 동기가 훨씬 높다.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약속한 각국의 감축 목표가 번번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파리협약처럼 강제적인 제재 조치 없이 각국의 자발성에 의존하는 감축 정책으로는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을 절대 낙관할 수 없다. 우리의 바람과 달리 기후변화가 당분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다. 적응은 감축과 달리 철저히 국내 의제다. 감축은 지구촌 국가로서의 도리지만, 적응은 내국인 보호를 위한 책무다. 기후변화 적응에 실패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국민에게 돌아간다.

우선 안전 기준을 향후 예상되는 기후변화에 맞춰 재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번 홍수 피해를 키운 저류시설을 비롯한 방재시설의 설계 기준은 50년 빈도 확률 강수량을 적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이제 100년 만의 폭우를 경험했으니 100년 빈도로 높이면 될까. 50년이건 100년이건 모두 기후변화 이전 과거 데이터일 뿐이다. 기후변화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현재 진행 중인 미래의 사건이다. 오히려 선험적 미래 예측치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결코 결과를 낙관할 수 없는 감축에만 집중하기보다 기후변화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적응 정책의 우선순위를 높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