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세제 혜택 대상에서 한국 업체 차종이 빠진 것과 관련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게 직접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21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박 장관은 지난 19일 블링컨 장관과 통화하는 과정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한국의 우려 사항을 전달했다.
박 장관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해 한국 업계가 우려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고 유연한 이행을 바란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우려를 외교당국 최고 책임자 선에서 직접 전달한 것이어서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는 당시 통화 후 각각 보도자료를 내고 두 장관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 문제가 거론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려졌다.
박 장관은 같은 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서도 "전기차 보조금 개편안에 대해 우리 업계의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미국 측에 여러 채널을 통해 우려를 전달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는 내국민 대우 원칙이 있고,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에는 최혜국 대우 원칙이 있다"며 "이런 원칙에 위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일정 요건을 갖춘 전기차에 한해 중고차는 최대 4000달러, 신차는 최대 7500달러의 세액 공제를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북미에서 차량을 조립해야 할 뿐 아니라 내년 1월부터는 일정 비율 이상 미국 등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해야 하는 등 추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미국에서 판매 중인 현대 아이오닉5, 기아 EV6는 전량 한국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크게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나 투자 약속을 받으면서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자리에서 정 회장은 미국에 2025년까지 로보틱스 등 미래 먹거리 분야에 50억달러(한화 약 6조68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이는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전용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투자하는 55억달러(약 7조3480억원)와는 별개로, 2025년까지 미국에 총 105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것이었다. 현대차의 통큰 투자는 중간 선거를 앞둔 바이든 대통령에게 건네는 정 회장의 선물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방한 기간 동안 바이든 대통령과 단독으로 면담하고 투자 발표까지 한 것 역시 정 회장이 유일했다. 당시 정 회장은 "바이든 행정부가 우리 미국 사업에 지속적인 지지를 해주기를 정중히 요청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 회장에게 "미국을 선택해준 데 대해 감사하며 미국은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현대차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던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은 3개월만에 뒤집혔다.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인해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판매에 비상이 걸렸다.
현대차그룹의 아이오닉5나 EV6를 사려는 미국 소비자는 차량 1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2만원)인 세액 공제 형태의 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1000만원의 보조금이 사라지면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다른 전기차들과는 경쟁이 불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이른바 반도체 동맹인 '칩4' 가입을 두고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반응이 미국 정부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다"며 "전기차 전환을 앞두고 미국에서 판매량이 늘고 있는 현대차를 견제하고 미국 자동차 업체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