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고산 에이팀벤처스 대표는 한국인 최초 우주인 후보로 유명합니다. 지금은 제조업 매칭 플랫폼 '카파'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의 대표죠. 올해 초에는 윤석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합류해 인수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또 비영리법인 타이드인스티튜트를 설립해 TEU 프로그램(혁신가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회사 경영을 하면서 물론 창업 정책 입안과 교육에 참여하는 등 스타트업 생태계 이곳 저곳을 바쁘게 오가고 있습니다. 한경 긱스(Geeks)가 고 대표를 만나 그의 창업 스토리를 들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유니콘 만들기'가 목표였어요. 목표대로 잘 만들었죠. 그런데 그 유니콘 대부분은 B2C 내수용 플랫폼 스타트업이에요. 이제부턴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글로벌 유니콘들이 나와야 합니다."
고산 대표는 "좋은 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들을 한국으로 다시 불러모을 수 있는 방법은 한국에서 글로벌 유니콘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전 세계 혁신가들이 다 모이듯이 한국 벤처 생태계도 글로벌화돼야 한다. 외국인들도 한국에 와서 창업하려고 할 만큼"이라고 했다. "미래가 보이면 기업가 정신 나온다" 고 대표는 어쩌다 스타트업 업계에 뛰어들어 혁신가 교육과 벤처 진흥 정책 입안까지 하게 됐을까. 그는 윤석열 정부 출범을 위한 인수위원으로 일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취합하게 된 계기에 대해 "창업 교육 비영리법인인 타이드인스티튜트를 만들면서 당시 카이스트 창업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던 안철수 의원에게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 만나자고 한 적 있다. 이를 계기로 안 의원과 인연을 맺었고, 안 의원이 내가 하던 창업 교육 활동을 인상적으로 본 것 같다"고 했다.
타이드인스티튜트는 고 대표가 2011년 만든 혁신가 양성을 위한 단체다. 실리콘밸리 ‘싱귤래리티대(Singularity University)를 벤치마킹해 혁신가 양성 프로그램인 TEU를 운영한다. TEU가 키우고자 하는 혁신가는 '무엇인가에 미친' 사람들이다. 고 대표는 미친 아이디어에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씨앗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2018년부터는 이경옥 대주D&C 대표가 타이드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고 대표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정책을 공부하려고 유학을 떠났다가 싱귤래리티대의 기술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미래 과학 기술을 사업화하는 벤처 창업가를 육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싱귤래리티대에 모인 사람은 모두 '미래'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어떤 게 '미래'가 될지 너무 보였고, 기업가 정신이 자동으로 발현됐습니다." 케네디스쿨을 중퇴하고 한국에 돌아와 타이드를 설립한 배경이다.
타이드를 운영하면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창업을 꿈꾸게 됐다. 타이드의 또 다른 파트인 '팸랩서울'을 이끌면서 특히 제조업에 관심을 가졌다. 2013년 3D프린터 제조업을 초기 모델로 삼아 에이팀벤처스를 창업했다. "전 원래 창업을 생각하던 사람은 아니었는데 싱귤래리티대와 타이드에서의 경험들이 마음을 흔들어놨습니다.""스타트업 어린애 다루듯 하면 안돼" 고 대표는 우리나라에 어떤 방향의 창업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을까. 그는 "지금까지 정부가 각 시대마다 그 때 추구해야할 정책을 잘 맞춰서 해왔다고 본다"며 "이젠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핵심 기술 창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꾸준히 창업 환경을 쌓아올린 덕에 유니콘들 여럿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유니콘이 거의 없는 건 아쉽다고 했다. 고 대표는 "유니콘이 된 B2C 플랫폼들이 해외 진출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건 이제 그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정부가 지원하고 육성해야 할 부분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 기반의 B2B 기업들"이라고 했다.
그는 "스타트업들을 너무 어린 애 다루듯이 하지 말고, 스타트업들이 알아서 진행하도록 '턴키방식'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고 했다. "정부 지원 포맷이 너무 디테일하고 잘개 쪼개져있으면 지원받는 스타트업 입장에선 거기에 맞추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증명해야할 뭔가를 제출해야하는 절차가 들어가면 또 복잡해지죠. 지원을 할 때 민간 자율성을 늘려야 합니다."
정부가 창업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칸막이를 치는 게 오히려 기업들의 혁신 움직임을 제약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고 대표는 "예를 들어 정부가 AI 기업을 지원한다고 가정해보면 AI 분야 안에서 사업적으로 디테일하게 칸막이를 치면서 분류를 하게 되면, 이 규격에 맞지 않아 지원을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정부 지원책들도 시기마다 유행을 탄다고 했다. 문제는 정부 지원 트렌드가 시장 움직임보다 늦는 경우가 많다는 것. 고 대표는 "정부 지원책이 유행을 만드는데, 이게 지금 이 시점에서 시장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맞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다른나라에서 어느 정도 이미 진행된 걸 보고 벤치마킹해서 지원책을 만들죠. 패스트팔로워 전략인데, 지금까지는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글로벌 핵심 기술 기반 창업을 얘기하는 상황과는 맞지 않습니다."
연구실 기반 창업도 강화돼야 한다고 했다. "연구실에서 나온 R&D 결과물을 사업화하는 게 중요한데 지금은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이스라엘 히브리대의 '이숨'이라는 기술이전 센터를 방문한 적 있는데 그 곳은 보유 기술을 기업에 이전하기 위해 영업을 열심히 합니다. 각 회사에 메일을 보내고 '콜드콜'까지 해요. 한국에도 이숨 같이 '액티브'한 기술 이전 조직이 필요합니다." "피봇 과정서 모든 팀원 안고 가려 했는데…"고 대표의 에이팀벤처스는 제조업 매칭 플랫폼인 카파를 운영하고 있다. 제품 제작을 원하는 고객이 온라인에서 도면과 함께 제작을 의뢰하면 카파에 파트너로 등록된 제조업체들이 고객에게 견적을 제시한다. 고객은 이들 중 원하는 제조업체를 선택해 계약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부품을 만들던 공장에서 기존과는 다른 종류의 부품에서부터부터 개인의 미술 졸업 작품 등 다양한 제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창업 초기의 사업모델이었던 3D 프린터 제조업에서 2020년 '피봇(스타트업이 다른 사업 모델로 전환하는 것)'했다. "이미 글로벌 3D 제조회사들이 자리를 잡은 뒤에 시장에 진입하려니 어려움이 있었다. 후발주자인 중국이 엄청나게 빨리 치고 들어오는 것도 위협이 됐다"고 했다.
피봇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고 했다. 3D프린터 제조업을 완전히 놓지 못하고 새로운 사업과 함께 병행했던 기간이 3~4년이나 됐다. "3D프린터를 만들기 위해 구축했던 팀 멤버들과 계속 함께 가려는 시도들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게 대표로서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고 지금은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 분(직원)들의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요. 제조업 매칭 플랫폼으로의 사업전환을 하자는 거였는데 3D 프린터를 제조하는 데 전문성이 있는 직원들은 그 사업에 어울리지 않잖아요. 이런 문제에 대해 다 투명하게 내놓고 그 분들과 얘기를 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한 팀이고 의리가 있으니까 계속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습니다. 늦었지만 그 분들은 대부분 회사를 나가셔서 지금은 다른 곳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제조 분야에 혁신 더하면 미래 바뀐다" 왜 제조업 매칭 플랫폼이었을까. 그는 3D 프린터 사업을 하면서 제조업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3D 프린터를 만들려 했을 때 일단 공장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부품 하나 하나를 어디서 어떻게 소싱 해야할지부터가 문제였습니다. 3D 프린터가 엄청나게 복잡하지 않은 기기인데도 그랬어요. '제품을 만드는 게 진짜 너무 힘들구나, 제조업은 왜 이렇게 IT의 손길이 가 닿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고 대표는 제조업에 혁신의 요소가 많다고 느꼈다. "제조업 견적은 정가가 있지가 않습니다. 공장들이 처음엔 단가를 낮게 주다가 점점 가격을 올립니다. 수요자 입장에선 공장을 찾기 힘들다 보니 한번 찾은 공장에 의존도가 높아지고요. 그래서 가격이 비싸져도 다른 공장을 찾을 엄두를 못 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오프라인으로 진행되고요." 고 대표가 도면 공유와 견적 등 제조업 내 계약 과정을 온라인 플랫폼화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 배경이다.
그는 "블록체인 같은 멋드러진 신산업 먹거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동안 오래 쌓아온 제조업 역량을 잘 살려내는 것도 중요하다"며 "전통 제조업이 다른 레벨로 갈 수 있도록 기술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카파에는 CNC, 공작기계, 3D 프린팅, 사출성형, 판금, 주조 등 다양한 제조가 가능한 2300여 제조업체가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도면에 특화된 협업 소프트웨어인 '카파 커넥트'도 출시했다. 도면을 클라우드 서버에 보관, 필요시 원하는 사람들과 쉽게 주고 받을 수 있다.
"부품업체들도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부품들을 생산하는 전략이 필요하죠. 카파 같은 제조 플랫폼이 이들 제조회사들에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조업을 다음 단계로 끌어올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비즈니스라고 봅니다."
고은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