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장 임기 4년 동안 필자는 가방(백팩)을 메고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편도 한 시간여 거리인데 두 번 환승하며 다녔다. 만원 지하철 속에 부대끼는 출퇴근 길은 고역이고 그때마다 승용차의 유혹이 아른거렸지만 걷기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혼잡한 시간의 지하철 이용은 즐겁지 않았지만, 출퇴근길에서 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대화는 즐거웠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 대략 10분 정도 걸리는데, 매일 앞서 걷는 한두 명의 학생에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오랜 등하교 대화로 접선(?) 방법에 내공이 붙었다. 학교장이라도 느닷없이 아는 체하거나 몇 학년 몇 반 누구냐고 물으면 안 된다. 등하교길의 편한 걸음이 딱딱하고 뻘쭘(?)해지면 좋은 대화로 이어지기 어렵다.
학생 대부분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있는데 같이 걸으면서 슬쩍 말을 붙여본다. “무슨 노래야? 발라드, 힙합? 가수 누구 좋아해?” “OOO? 처음 듣는 가수네! 교장쌤도 나중에 들어봐야겠다.” “어젯밤에 게임 많이 했니? 롤, 피파온라인…레벨이 높구나!” “주말에 뭐 했어? 헤어스타일이 멋진데!” “이야! 너 목소리도 좋은데, 뭔가 잘 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자신의 고민을 살짝 들려주고 진로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이렇게 접근해 얘기하다 보면 가끔 학생들 가방에 달린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친구들끼리 주고받은 다른 학생의 명찰이다. 얼마 전에는 다른 학생 명찰을 여러 개 붙인 학생을 만났다. 더구나 그중 하나가 다른 학교 여학생의 명찰이어서 적이 놀랐다.
“어디 여학생 명찰을 뺏어 온 거냐?”고 물었더니 “아닙니다. 걔가 준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얘가 연애 대장인가 하는 생각이 맴돌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되물었다. “아니, 다른 학교 여학생이 자기 명찰을 네 가방에 매달고 다니라고 줬다고?”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꼰대를 면할 수 있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아하! 여친이 너를 찜했으니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감히 넘보지 말라고 한 거구나?” 하니, “헤헤. 그런 것 같습니다”라고 해맑게 웃는다.
함께 걷는 동안 여자친구와 만난 아름다운 무용담을 들었다. 그리고 인문계 여친이 요즘 공부도 소홀히 하고 이것저것 좀 방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고 털어놓는다. 늠름한 녀석이다.
문득, 그 여학생이 보고 싶어졌다. 남자친구가 네 명찰 잘 붙이고 다니니까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너나 잘하라고, 교장쌤이 네 남친 잘 보살필 테니 그대도 자기 진로 잘 찾으라고, 그리고 남친 꽉 잡으라고 전해 주고 싶다. 이래저래 부러운 청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