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경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영국 등 소위 ‘미들 파워급’ 나라들은 독자적으로는 경쟁이 안 됩니다. 이 그룹과 유럽연합(EU)이 힘을 합하면 미국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죠.”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사진)는 지난 12일 일본 도쿄 와세다대 연구실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이렇게 말했다.
후카가와 교수는 자타공인 일본 최고의 한국 경제 전문가다. 1983년부터 40년 가까이 한국 경제를 연구했다. 책상에서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를 직접 체험하고 관찰했다. 산업연구원(KIET) 등 국책연구소와 연세대 고려대 등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지금도 매년 한국을 방문한다.
그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슈퍼 파워’에 낀 한국과 일본이 라이벌 의식을 적절히 살리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한국과 일본이 블록경제권을 형성해서 대응하자고 주장하셨는데요. 어떤 구상인가요.
“미국과 중국 경제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EU도 독자적인 블록을 형성하고 있지요. 또 하나는 소위 ‘미들 파워급’ 나라들입니다. 한국과 일본, 유럽에서 떨어져 나온 영국, 칠레 페루 호주 뉴질랜드 등 자원대국 등이 포함됩니다. 이 나라들은 독자적으로는 미국 중국과 경쟁이 안 됩니다. 대신 이 그룹과 EU가 힘을 합치면 미국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EU가 힘을 합치는 구도가 되는 건가요.
“EU와 TPP의 연합도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EU와 TPP, 영국을 합친 경제 규모는 미국과 중국을 넘어서니까요.”
▷블록경제권으로 미국 중국 등 세계 양대 파워에 대응하는 게 정말 가능한가요.
“한국은 일본과 다툴 때가 아니죠. 미국과 중국이 계속 싸우면 가장 곤란한 나라가 한국이잖아요. 하지만 한국 혼자서 미·중의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나요. 일본도, 영국도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겁니다.”
▷한·일 관계가 악화한 이후 한국에서는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를 국산화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대일 무역적자는 악이다. 한국은 일본에서 막대한 양의 소재와 부품을 수입하는데 일본은 한국 제품을 사지 않는다. 그러니 빨리 국산화해서 수입을 줄여야 한다’는 발상은 지난 35년간 전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만나본 한국 기업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기업은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니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국 기업, 일본 기업 가릴 것 없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소재·부품·장비를 조달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살아남으니까요.”
▷경제학의 비교우위론에 따라 일본이 강한 소재와 부품, 장비를 구입해 한국이 잘하는 완성품을 만드는 게 서로 이익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수출 규제 같은 돌발변수가 협력관계를 흔드는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일본의 반도체 핵심소재 규제는 분명 좋은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국산화가 안정적인 공급을 보장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글로벌 공급망 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보조금을 줘서라도 필요한 공급망을 모두 국산화했다고 가정해 보죠. 삼성 같은 대기업이라도 모든 공급망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으니 중소기업에 맡기겠죠. 그런데 이 기업에 사고가 일어나거나, 전력 위기가 발생하거나, 북한의 폭탄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기업은 정부가 시키지 않아도 공급망 안정을 위해 훨씬 필사적으로 고민합니다. 시장의 메커니즘을 존중하는 게 중요합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