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사진)이 8·15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돼 경영 활동이 가능해지게 되면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대응하는 그룹 방향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황 둔화 우려, '칩4' 동맹을 둘러싼 미중 긴장 고조, 대만 TSMC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경쟁 등 그 어느 때보다 경영 환경이 불투명한 상태다. 이 부회장이 먼저 인적 쇄신으로 조직에 긴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정부 "경제위기 극복 위해 이재용 부회장 복권"정부는 지난 12일 서민생계형 형사범·주요 경제인·노사관계자·특별배려 수형자 등 1693명을 이달 15일자로 특별사면·감형·복권 조치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면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이 부회장은 사면이 공식 확정되자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 앞에서 "국가 경제를 위해 열심히 뛰겠다. 감사하다"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부회장은 2017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지난해 8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형기는 지난달 29일 종료됐지만 5년간 취업제한 규정을 적용받던 상태. 하지만 이번 사면으로 취업 제한이 풀리면서 자유로운 경영 활동이 가능해졌다.
정부는 대상자를 발표하면서 "경제 활성화를 통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최근 형 집행을 종료한 이 부회장을 복권한다"고 별도로 이유를 밝혔다. 이 부회장 사면 이유가 '경제 살리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부회장의 사면은 정치인들과 비교했을 때 국민적 공감대가 높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최근 여론조사 기관 데이터앤리서치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국민 63%은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 등 4개 여론 조사 전문회사가 지난달 25~27일 진행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도 이 부회장의 사면을 찬성하는 의견은 77%로 집계됐다. 국민들도 현재 경제 상황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고, 이 부회장 역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부회장 역시 여론을 인지하고 따로 입장문을 내 국민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동안 저의 부족함 때문에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하다는 말씀도 함께 드린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더욱 열심히 뛰어서 기업인의 책무와 소임을 다하겠다"며 "지속적인 투자와 청년 일자리 창출로 경제에 힘을 보태고, 국민의 기대와 정부의 배려에 보답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와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124조 달하는 현금성 자산 어디에 쓸까사법 리스크를 모두 털어낸 이 부회장의 경영 리더십은 이제 본격 시험대에 올랐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업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10만 전자'를 바라보던 삼성전자의 주가는 '5만 전자'로 주저앉은 상황. 이 부회장은 반도체 등 주력사업 초격차 유지는 물론 시장 우려를 잠재우고,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성장동력을 키워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특히 삼성전자가 지난 30여 년간 압도적 경쟁력을 보인 메모리 반도체는 거대한 내수시장과 국가 차원의 전폭 지원을 받는 중국 업체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우리 정부가 참여를 타진하고 있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동맹체 칩4 상황도 중국이 거세게 반발해 녹록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 부회장의 판단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글로벌 기업과의 초대형 빅딜 소식도 조만간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 기업인 ARM,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반도체와 인피니온 등을 인수 기업 물망에 올려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전장과 인공지능(AI), 5G 통신 및 바이오 분야에서도 투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124조원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한 삼성의 대형 M&A는 2016년 11월 미국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을 9조4000억원에 인수한 이후 멈췄다. 그룹 총수가 결단을 내려야 하는 만큼 그동안 미뤄지고 있던 사안이라 이 부회장이 M&A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이 부회장은 폭넓은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2030 부산 세계박람회(부산엑스포) 유치 지원에도 적극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선친 고(故) 이건희 회장 역시 2009년 사면 뒤 해외 각국을 돌며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에 발 벗고 나선 바 있다.결국 경영 복귀는 삼성 인사와 직결된 문제언급을 극도로 꺼리고 있지만 삼성 내부에선 이 부회장의 '회장' 승진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 승진과 맞물려 인적 쇄신에 대한 기대와 우려의 분위기가 동시에 감지되는 모습이다.
올해 54세인 이 부회장은 2012년 12월 44세의 나이에 부회장직에 오른 뒤 10년째 직함을 유지 중이다. 4대 그룹 가운데 회장 타이틀을 달지 못한 총수는 이 부회장이 유일하다. 같은 오너가 3세로 이 부회장보다 어린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도 이미 회장직에 올랐다. 회장은 법률(상법)상의 직함은 아니어서 사내 주요 경영진이 모여 결정하면 된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 1987년 45세의 나이에 회장이 됐었다.
이 부회장이 등기 임원에 오를지도 관심이다. 이 경우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야 한다. 이 부회장은 2019년 10월26일 3년 임기를 끝낸 뒤 등기 임원에서 내려왔고 현재는 무보수 미등기 임원이다. 그동안은 가석방 상태여서 등기임원을 맡을 수 없었지만 복권으로 등기임원이 될 길이 다시 열렸다.
삼성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사면에 대해 이 정도로 찬성 여론이 높았던 적이 없다고 들었다"며 "사실상 삼성은 국민들이 이 부회장을 사면해줬다고 인식하는 분위기여서 반드시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 업황 둔화 우려, 칩4를 둘러싼 미중 갈등, TSMC와의 파운드리 전쟁, 중국 메모리반도체 추격 등 이 부회장 앞에 놓인 과제가 만만찮다"며 "내부적으로는 '승진' 이슈가 돌고 있기 때문에 집안 단속과 인사 정리에 대한 이 부회장의 고민이 만만찮을 것"이라고 봤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는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악조건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부회장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며 "사실상 경제위기가 이 부회장의 사면길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이 부회장이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는지, 누구를 내치고 누굴 중용하는지 그룹 안팎에서 시선이 집중될 것"이라며 "높은 찬성 여론으로 사면이 됐기 때문에 성과에 대한 이 부회장의 결심이 남다를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어 "하반기 철저히 성과에 기반한 '인사 태풍'이 불면서 대대적 물갈이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