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노르트스트림을 통해 보내던 가스를 20% 줄이면서 국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배럴당 120달러를 웃돌던 국제 원유 가격은 100달러 언저리에서 횡보하고 있다. 지난 5일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23개국이 참여한 OPEC+ 회의 결과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지난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란 방문 이후에 열린 회의여서 결과에 기대가 있었지만 10만 배럴 소규모 증산에 그쳤다.
언론에서는 이런 합의가 전체 석유 수요의 0.1%에 불과할 만큼 ‘찔끔’ 증산이라며 바이든의 외교 실패로 평가하기까지 한다. 어쨌든 바이든 대통령과 사우디 왕세자의 주먹 악수도, 푸틴과 이란 지도자가 손을 높게 들어올린 장면도 회담의 실질적인 성과보다 이미지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번 합의로 드러났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 소강상태를 벗어나 큰 변화가 없는 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한 유가 급등락은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 러시아의 수출과 생산이 한계를 보이면 그 결과에 따라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다른 회원국들의 추가 증산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셰일오일 생산으로 최대 산유국이 된 마당에 사우디가 유가 하락을 감수하며 대폭 증산할 유인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국제 원유시장은 과거 경험을 보면 전쟁 등 지정학적 이유로 급등 현상을 보이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다시 원상회복을 거듭했다. 1970년대 사우디를 중심으로 유전을 국유화하고 수출물량을 통제하면서 발생한 석유파동은 북해, 아프리카 등지에서 새로운 유전이 계속 개발되고, 액화천연가스와 원전 같은 석유 대체 에너지가 급속히 보급되는 계기가 되면서 1980년대 들어 유가 폭락 사태를 겪게 했다.
1990년대 이후 유가 상승은 지정학적 요인보다 중국 등 신흥국 경제의 성장으로 인한 수요 급증에서 비롯한 측면이 크다. 2010년 이후에는 미국의 셰일원유 생산에 의한 공급 증가로 일시적 급락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시장의 실패를 가져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시장의 안정이 있었기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노력이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였다.
그러나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래 에너지 시장에 큰 과제를 던졌다. 화석연료 시대에 사우디와 함께 에너지 패권국가로 분류돼온 러시아가 자원을 무기화함에 따라 에너지의 안정 공급과 기후 대응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마무리된 후 과거와 같은 화석연료 시대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우선, 유럽과 영국이 2030년까지 러시아에 대한 의존을 없애기 위해 원전의 역할을 재평가하며 수소를 미래 에너지로 적극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고 있다. 천연가스 개발에 그동안 소극적이던 사우디도 새로운 가스전을 개발, 수소와 암모니아를 대량 생산해 수출할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로 늘어난 에너지 수입으로 인해 상반기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하고, 물가가 급등하면서 우리 경제 운용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고, 에너지 가격에서 시장 기능을 강화하며 에너지 신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은 옳지만 아직 어떻게 할지 전략에 대한 구체화는 미흡하다. 1980년대에는 연간 25조원 남짓한 재정지출에서 1조원 이상의 석유사업기금을 활용해 에너지사업을 구조조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전이 상반기에 13조원에 달할 정도의 적자를 보이는 등 정부의 여력이 없다. 결국 수소 등 민간이 적극적인 투자 의지를 보이는 분야의 규제 개선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