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창고 4억 식자재 물에 잠겨…상인들 '망연자실'

입력 2022-08-09 17:36
수정 2022-08-17 15:19

“지하 창고에 있는 식자재 4억원어치가 물에 잠겼어요. 갑자기 물이 계단까지 차올라서 경찰과 소방서에 몇 번이고 신고했지만 올 수 없다는 말만 했습니다.”

한밤의 기습폭우가 지나간 9일, 서울 이수역 인근에서 식자재 유통센터를 운영하는 정모씨(64)는 울먹이며 피해 상황을 전했다.

근처 남성사계시장 일대는 전날 내린 폭우로 흙과 쓰레기, 버려둔 차량들까지 엉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식자재 매장까지 밀려든 물에 전자기기와 식자재가 젖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금전적 피해를 본 상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게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 상인은 “50년간 이곳에서 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저지대 자영업자들 망연자실동작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김모 약사(52)도 2억원이 넘는 피해를 봤다. 하수구 물이 역류하는 듯하더니 약국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빗물은 순식간에 허리까지 차올랐다. 그는 “의료기기와 건강기능식품들이 물에 젖어 전부 버려야 한다. 모두 두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8일부터 9일 오전 11시까지 서울의 누적 강수량은 425.5㎜를 기록했다. 7월 한 달 평균 강수량보다 많은 비가 하루에 쏟아진 것이다. 8일 동작구 신대방동엔 시간당 141.5㎜의 비가 내리며 서울 강수량 최고 기록(118.6㎜)을 80년 만에 넘어섰다.

이수역 주변뿐 아니라 서울 남부를 중심으로 자영업자의 폭우 피해가 유독 컸다. 서초구 한 아파트 상가에선 자영업자 10여 명이 나와 물에 젖은 음식과 가구, 즉석식품 등을 밖에 내놓고 있었다. 상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씨(41)는 “매장 전체가 침수돼 300만원 가까이 피해를 봤다”며 “오픈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설탕과 밀가루, 원두 등 식재료를 다 버리게 생겼고 커피 기계도 작동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출퇴근길 교통대란…각종 행사 취소지하철 운행이 중단되고 차량 침수 피해가 속출한 탓에 이날 시민들의 출근길은 한 시간 가까이 지연됐다. 오전 9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 차도에는 100m 남짓한 거리에 침수된 차량 50여 대가 뒤엉킨 채 방치돼 있어 차량 통행이 불가능했다. 지하철 3호선 대치역에서 도곡역 사이 600m 구간 차도는 차량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정체돼 있었다.

이촌역에서 신논현역으로 출근하던 황모씨(27)는 “동작역에서 환승하려고 했는데 직원 누구도 환승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코로나19처럼 서울시나 구청에서 침수 관련 정보를 왜 문자로 보내주지 않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날 오후 6시 지하철 3호선 지축역~대화역 구간 양방향 운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면서 퇴근길 시민들의 발길도 묶였다. 코레일 관계자는 “오후부터 시작된 집중호우로 화정역과 원당역 사이 선로가 침수되면서 열차 운행이 중단됐다”고 말했다.

문화예술업계에도 폭우 피해가 잇따랐다. 국립국악원은 오는 12~14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기로 한 ‘임인진연’ 공연을 올해 말로 연기했다. 8일 집중 호우로 공연장 전기실 및 기계실이 침수돼 예정대로 공연하기 힘들어진 탓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번 집중호우로 9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됐다. 8일 관악구의 반지하 주택이 침수되면서 일가족 3명이 숨졌고 동작구에선 가로수 정리 작업을 하던 구청 직원이 감전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정부서울청사 재난안전상황실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오늘도 어제 수준의 집중호우가 예상되는 만큼 선제 대응하고, 신속한 인명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장강호/권용훈/이광식/신연수 기자 callm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