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건 결국 인간의 생을 지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소설가 김훈(74·사진)은 3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장편소설 <하얼빈> 출간 기자 간담회에서 “학생 시절 일본 경찰이 작성한 안중근 심문 조서를 읽은 뒤 그의 청춘을 소설로 쓰는 건 내 청춘의 소망이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하얼빈>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순간과 그 전후의 일들을 다뤘다.
소설이 나오기까지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는 “밥벌이에 시달리느라, 안중근의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오랜 기간 소설을 방치해 놓고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건강이 안 좋았다가 올초 회복되자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다’는 절박함이 밀려들었다. 결국 당초 구상의 절반으로 압축해 소설을 완성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안중근의 경로를 따라가는 현지 취재를 못하고 소설을 썼다”며 “이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장악력을 느끼지 못한 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라고 했다.
김 작가는 “서른한 살 안중근은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 우덕순과 만난다”며 “두 사람은 ‘이 일을 왜 해야 하느냐’ ‘총알이 넉넉하냐’ ‘거사 자금이 얼마나 있으냐’ 이런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간다”고 설명했다. “조서를 읽으며 ‘혁명에 나가는 인간의 몸가짐은 이렇게 가벼운 것이구나’ ‘이런 것이 혁명의 추동력이고 삶의 열정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 거사를 처음 이야기하는 장면을 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반면 안중근의 가족에 대해 쓰는 건 고통이었다. 김 작가는 “안중근은 10월 26일 총을 쐈는데, 거사 이후를 걱정해 황해도를 떠난 처자식은 10월 27일 하얼빈에 도착했다”며 “이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은 다 묘사할 수가 없어서 안중근의 대사 한 줄로 뭉개고 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소설 속 안중근은 여순감옥 면회실에서 만난 동생에게 말한다. “내가 내 처에게 못할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가족에 대한 부채감과 시대적 대의에 대한 고민이 응축돼 있다.
소설은 안중근의 결단을 영웅담처럼 전하지 않는다. 청년 안중근의 불안과 고민, 시대적 상황을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김 작가는 “안중근-이토, 문명개화-약육강식, 그리고 반쯤은 제국주의에 발을 걸치고 있던 천주교 사제와 안중근 간 갈등을 세 축으로 삼아 소설을 전개했다”며 “이토라는 인물 안에도 문명개화라는 대의와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 묘사하려 했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