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유전도 뚫는다…전환기 에너지기업은 변신중" [실리콘밸리 인사이드]

입력 2022-08-03 06:43
수정 2022-08-10 08:06
이 기사는 프리미엄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한경 긱스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자동차업계에서 자율주행 기술개발이 한창이라면 에너지업계에선 유전 자동 시추시스템이 개발하고 실제 적용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에너지업계도 에너지 전환기에 필요한 디지털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고 있는 거죠."

유전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정반대였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거대한 기계장비를 돌려 원유를 끌어올리는 현장도 변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었었다. 석유공학 엔지니어 정철균 슐럼버저 인공지능(AI)팀 팀장은 "넷제로(탄소 중립)이라는 화두가 현실화하며 오일 메이저를 비롯한 에너지업계 전반이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T)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AI가 시추하는 유전정 팀장은 정통 석유공학 엔지니어다. 서울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에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스탠포드대에서 에너지자원공학 석유공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2014년 슐럼버저에 입사해 현재는 AI 솔루션 팀을 이끌고 있다. 슐럼버저는 에너지 업계의 구글이라고 불릴 정도로 원유 탐사부터 생산까지 모든 단계에 걸쳐 필요하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다. 뉴욕증시 상장사이기도 하다. 엑슨모빌, 쉘, 토탈, BP 등 오일메이저들이 주요 고객이기 때문에 에너지업계의 주요 기업들이 겪고 있는 변화와 현재 필요로 하는 기술과 장비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가 풀어낸 이야기 중에 단연 눈길을 끌었던 것은 AI가 적용된 유전 자동 시추시스템이었다.

"원유와 가스를 뽑기 위해 시추를 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머신러닝을 통해서 다양한 시추 데이터를 학습하고 실제 시추 과정에서 이상징후를 찾아내서 위험요소를 알려주는 AI 솔루션이 적용됐죠. AI가 현재 상태 등을 판단해 어떤 각도로 저류층을 파고들어야하는지도 결정해줍니다."

시추 과정을 AI가 진행하는 유전 자동 시추시스템은 실증을 마친 상태다. 120여년 역사의 유전개발기술업체인 슐럼버저는 '유전업계의 자율주행차'로 불리는 이 시스템을 실제 유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이 개발 과정에서 정 팀장은 드릴링과 측정에 필요한 AI 솔루션을 제공하며 시스템 개발에 기여했다. 에너지기업에 부는 변화 바람정 팀장은 인터뷰 내내 '에너지 전환'이란 키워드를 강조했다. 워낙 많은 자본을 투자해야 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굉장히 보수적인 에너지업계도 지금은 넷제로를 달성해야 한다는 화두가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정 팀장은 최근 이같은 에너지 대전환의 시대에 기업들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고 앞으로 또 어떤 준비를 해야할지를 담은 『넷제로 에너지 전쟁』이란 책을 지인들과 함께 펴냈다.

정 팀장은 슐럼버저의 고객인 오일 메이저들이 에너지 전환기에 다각화(Diversification), 탈탄소화(Decarbonization), 디지털화(Digitization)라는 3D를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 팀장은 "에너지 기업들이 석유나 가스 뿐만 아니라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에너지원에 투자하고 있다"며 "에너지 전환기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탈탄소화는 이미 오일메이저들이 확보하고 있는 기술이다. 석유와 가스를 뽑아내고 난 뒤 남은 공간에 이산화탄소를 집어 넣어 밀폐시키는 CCS (Carbon Capture and Sequestration) 기술이 대표적이다. 정 팀장은 "원유를 추출하는 것이 탄소 배출을 늘리는 행위라면 CCS는 이산화탄소를 없애는 기술"이라며 "엑슨모빌 등 오일메이저들은 탄소배출권 시장이 형성되면 이 기술을 활용해 원유도 캐면서 이산화탄소도 줄이며 수익을 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추 현장에서는 자동화도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 유정을 하나 파서 관리하는 데는 엄청난 서류 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문서를 서로 주고받는 복잡한 프로세스가 필수였다. 정 팀장은 "클라우드 시스템으로 함께 디지털 작업계획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데이터들을 함께 실행하면서 사람과 문서가 움직이지 않고도 자동으로 일하는 시스템이 확산되고 있다"며 "유정 하나 당 현재 10명이 관리하고 있다면 앞으로는 1명이 관리하는 곳이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에너지 로드맵 필요"결국 이런 에너지업계 변화의 근간에는 2050년까지 넷제로를 달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가 있다. 청정 에너지로 기존의 화력, 원자력 등 전통적인 에너지원을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완벽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은 2019년 사용 에너지량이 2050년까지 늘지않고 유지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에 대해 정팀장은 "에너지 사용이 늘어나는 트렌드가 한번에 바뀔 순 없다"며 "실현 불가능한 생각"이라고 선을 그었다.



"팬데믹 이후에는 인류에게 필요한 에너지 수요가 계속 늘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기존 에너지 사용량은 현재의 에너지원으로 충당하고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를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하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기존 화석연료를 통한 에너지는 기술 개발을 통해 탄소 발생을 최소화하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고, 재생에너지의 발전용량을 높여가며 넷제로 달성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자 정 팀장은 사견을 전제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30년, 50년 뒤까지 내다본 견고한 에너지 대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에너지 사용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처럼 다양한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투자하는 큰 그림이 필요하다"며 "2050년 한국의 에너지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공학적으로 실증 가능하면서, 경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세워야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이면서 명확한 에너지 로드맵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은퇴 후요? 현장에서 경력을 좀 더 쌓고 은퇴하게 되면 후학을 기르는 일을 해보고싶습니다. 학문적인 연구와 현장에서 경험을 접목해 에너지 분야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한국이나 한국 사회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실리콘밸리=서기열 특파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