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온다. 인우(이병헌 분)는 익숙한 멜로디에 멈춰선다. 그리곤 추억에 잠긴다. 대학 시절 연인 태희(이은주 분)가 들려줬던 음악이다. 태희는 그때 붉은 노을이 내린 바닷가 솔숲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인우에게 왈츠를 가르쳐줬다.
김대승 감독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2000·사진)에 나오는 장면이다. 배경 음악은 러시아 출신 음악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중 ‘왈츠 2번’. 태희의 콧노래에 맞춰 음악이 흐르고, 노을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함께 춤을 춘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장면이다.
영화 덕분에 이 음악도 국내에서 떴다. 첫 부분은 우아하면서도 경쾌하다. 그러다가 슬픔, 그리움, 애잔함 등으로 갈아탄다. 한 작품에 놀라울 만큼 다층적인 감정을 겹겹이 담아냈다. 영화 속 장면과도 잘 어울린다. 인우는 이 음악을 듣고 첫사랑 태희를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이 곡을 만든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1번’으로 21세 때 이름을 알렸다. 젊은 천재 음악가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유명 음악인까지 관심을 기울일 정도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젊은 시절 개방적이었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특히 재즈를 좋아했다. 미국에서 발전한 재즈는 자유분방함과 즉흥성이 특징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점에 매료돼 재즈를 자신의 음악에 접목했다. 재즈뿐 아니라 교향곡 2번과 같은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작품도 여럿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위기의 시작은 28세 때 만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초연 무대였다. 옛 소련 최고 권력자 스탈린이 이 공연을 보러 왔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다. 작품에 담긴 외도, 살인 등 자극적인 장면에 스탈린이 거부감을 느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오페라는 수십 년간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소련 정부는 그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의 작품을 검열했다. 재즈를 포함해 다양성을 추구하거나 실험적인 작품들은 모조리 배척했다.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보여준 행보는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정책홍보 영화음악 등 스탈린 선전용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에 “스탈린의 독재를 앞장서 도왔다”는 꼬리표가 달린 이유다. 일각에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 “자신의 음악에 교묘하게 체제 비판 의식을 담았다”며 쇼스타코비치를 옹호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과오가 희석되지는 않는다.
쇼스타코비치가 젊은 시절 했던 ‘과감한 도전’을 스탈린 체제가 들어선 뒤에도 계속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다면 ‘훌륭한 음악가’를 넘어 ‘최고의 음악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으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예술과 정치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 땅의 예술가들에게 쇼스타코비치는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