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자본이 신흥시장에서 5개월 연속 빠져나갔다. 사상 최장 기간 자본이탈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 공포와 미국 중앙은행(Fed) 등 주요국의 금리 인상 기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신흥국·개발도상국이 통화 가치 폭락과 차입 비용 상승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현상이 길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국제금융협회(IIF)는 "3~7월 신흥국 주식과 채권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자금이 380억달러(약 49조6600억원)가 넘는다"고 30일(현지시간) 발표했다. 7월 한달 사이에만 105억달러에 달하는 자본이 이탈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관련 통계를 처음 추적하기 시작한 2005년 이후 5개월 연속 자본유출은 사상 처음"이라고 전했다.
선진국 자본시장에서 발행된 신흥국 채권에 대한 투자심리도 덩달아 급랭했다. JP모간에 따르면 글로벌 투자자들이 올해 들어 현재까지 신흥국 외국환표시 채권 펀드(EM foreign currency bond fund)에서 회수해간 자금 규모는 300억달러에 이른다.
올초까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투자자들은 신흥국들이 코로나19 충격을 딛고 발빠른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했다. 2월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원자재 시장이 요동치자 브라질, 콜롬비아 등 원자재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신흥국들에 엄청난 호재가 될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연일 심해지는 물가상승세를 잡기 위해 Fed가 강력한 긴축(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선진국 금리가 오르면서 금리차익을 노리고 신흥국 자산에 투자한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빠르게 청산됐다. 전 세계 경기침체 우려가 안전자산 선호 심리를 자극한 영향도 있다. 신흥국보다 더 안전한 선진국 시장에서 금리가 오르면 신흥시장에 남아 있을 메리트가 사라지는 것이다. 상하이 봉쇄조치 등으로 중국 경제가 둔화한 것도 투자자들이 신흥시장에서 발을 빼게 만들었다.
돈이 빠져나가면서 신흥국 통화가치는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또 신흥국 채권의 가격은 폭락한 반면 수익률(채권 가격과 반대로 움직임)은 폭등하고 있다. 미 국채 수익률과 신흥시장 최소 20개국의 외국환표시 채권 수익률 간의 격차(스프레드)는 최근 10%포인트 이상으로 벌어졌다. 신흥국이 채권 투자자들에게 갚아야 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의미다. 신흥국의 자본 조달 비용이 커지면 재정적 스트레스가 심각해지고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스리랑카가 해외 채무 디폴트를 선언했고,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모두 지난 석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투자자들이 신흥시장의 연쇄 디폴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금을 빼가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지급결제회사 코페이의 한 선임 전략가는 "신흥국들은 올해 정말 광기어린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셈"이라고 우려했다.
IIF의 조너선 포턴 이코노미스트는 "예전에는 신흥시장에서 자본이탈 흐름이 일부 있더라도 한 신흥국에서 다른 신흥국으로 옮겨가는 양상으로 버텼다면 이번에는 한번에 빠져나가고 있다"며 "전반적인 폭락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